눈을 감고 소리로 여는 관음의 세상 — 김점용 시집 『메롱메롱 은주』

김점용 시집『메롱메롱 은주』의 표지

1
우리는 삶의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도 종종 삶을 묻는다. 그 물음은 쉬운 물음이 아니다. 그 물음이 쉬운 물음이 아닌 것은 그 물음이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얘기에 기대어 이 물음의 성격을 좀더 명확히 해보면 왜 산을 오르는가라는 질문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산사람은 산을 자주 오른다. 그러니 산의 등산로에도 훤하고 어떻게 산을 올라야 안전한지 등등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축적하고 있을 것이다. 산을 더 많이 오를수록 어떻게 산을 오르는가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은 더더욱 해박해지고 정확해진다. 그 물음 앞에서 산은 확연하게 손에 잡힌다. 그러나 왜 산에 오르는가라는 질문을 앞에 놓는 순간 산은 갑자기 그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린다. 나아가 그 질문 앞에선 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더 멀리 달아날 수 있다. 수없이 산을 올라도 산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삶도 그렇다. 살면 살수록 삶은 삶을 묻는 질문 앞에선 더더욱 우리의 손을 멀리 벗어난다. 그것은 그 질문이 어떻게 돈을 모아 아파트를 마련해야 하는가를 묻고 그 질문에 대해 “더 늦기 전에/주택 부금도 하나쯤 들어야겠다”(「부장님 앞에서」,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문학과지성사, 2001)는 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어떻게 해야 사회적으로 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가를 묻는 것도 아니다. 그 질문은 우리는 왜 산을 오르는가를 묻는 질문에 더 가까우며 때문에 우리의 삶 자체를 묻고 있는 질문이다. 그 질문을 앞세우면 삶이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을 빠져나간다. 그 질문은 대답을 듣기도 어려운 질문이지만 아울러 위험한 질문이기도 하다. 때로 그 질문의 끝에서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삶을 뒤흔들 위험마저 있는 데도 우리들은 종종 그 질문을 회피하지 못하고 그 앞에 선다. 우리는 왜 삶을 묻는 것이고 또 물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김점용의 두 번째 시집 『메롱메롱 은주』를 읽으며 그 질문을 앞세웠고 그의 시집은 그에 답했다.

2
김점용이 삶을 물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삶이 아니라 삶을 담고 있는 그릇이었다.

생사가
그릇 속이다
—「그릇」 부분

시인은 “분갈이를 하고/물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인의 눈앞에서 오고 간 것은 화분에 심어진 꽃이나 분재가 아니라 ‘빈 그릇’이었다. 아마도 분갈이를 하는 와중에 몇 개의 화분이 정리가 되면서 빈 화분이 생겼나 보다. 그다지 특별한 장면은 아니다. 아주 평범한 일상에 가깝다. 시인이 “언젠가 분재에 열중인 사람에게/어린나무를 너무 학대하는 거 아니냐고 넌지시 묻자” 그 사람이 “화분에 옮겨진 자체가 모든 식물의 비극 아니겠냐고/심드렁하게 대꾸”하며 흘려보냈던 것처럼, 대개의 사람들은 그 장면을 그냥 무심하게 흘려보낸다. 그러나 김점용은 빈 화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화분에 “가족, 학교, 군대, 사랑, 일터”와 같이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내가 맺는 관계들이 겹쳐졌고, 그러자 나는 그 ‘빈 화분’이 실어 나른 수많은 ‘목숨’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언뜻 생각하면 화분은 그 화분에 심어지는 꽃과 나무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그러니 꽃과 나무에게 화분은 생명의 토대를 이루는 고마운 공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 인식과 달리 화분과 꽃의 관계에 대한 시인의 시선은 그렇게 호의적이질 않다. 그곳은 시인이 삶을 가꾸고 키워가며 보람을 얻는 작은 위안의 공간이 아니라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던”(「빈 화분」) 곳이다. 왜 시인은 삶의 뿌리이자 터이기도 한 그 공간을 빠져나오려 했던 것일까.
우선 가족이란 이름의 공간을 살펴보자. 김점용의 경우 그가 그 공간에서 부딪게 되는 대표적 존재로 아버지를 손에 꼽을 수 있다. 그가 있으니 그를 낳은 아버지는 분명한 실체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실체를 갖고 있음에도 아버지는 손에 잡히질 않는다.
“아버지가 찾아왔다”는 말에 아버지를 찾아 나선 그에게 어떤 “낯선 노인이 아버지 친구라며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다가 우물가에서 혼자 놀고 있다고 일러주”지만 우물가에서 그가 “아버지,/하고 불렀”을 때 돌아본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 친구”였다. 그 아버지의 친구는 아버지가 “애조원에서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며 거기로 가보라고” 일러주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아버지를 손에 잡지 못한다.

아버지,
하고 불렀더니 그는 꿈쩍도 않고 대신 문둥이가 뭉개진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쉿거렸다
등을 보인 아버지는 이번에도 아버지 친구일 터
상심하여 돌아서는데 그가 이번 판만 두고 보내마, 그랬다.
덜컥 겁이 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서 있으니
문둥이가 사라진 입술로 뭐라고 뭐라고 웅얼거렸다
원문고개 호떡집 아줌마한테 물어봐라, 그런 뜻으로 들렸다
그 집은 없어진 지 오래인데
—「검은 가지에 물방울 사라지면」 부분

그는 아버지를 찾았지만 번번히 그가 부른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다. 실제로 세상의 아버지들이 많은 경우 그렇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세상에 싹을 낼 뿌리를 내주었지만 그 싹이 깊이 뿌리를 내릴 토양이 되어주는 경우가 드물다. 아마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빚어지는 그런 관계는 어느 집안에나 있을 것이다. 현대적 가정에서 아이가 자랄 때 부모와 자식 사이의 세대적 단절은 종종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흔한 일이다. 가족은 종종 가장 가까이 있어 쉽게 손에 잡힐 것 같지만 전혀 손에 잡히질 않곤 한다. 잡히지도 않으면서, 그러니까 전혀 뿌리를 내릴 토양이 되어주지도 않으면서 가족은 또 어느새 우리의 삶 속으로 배어든다. 그가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젖”혔을 때 “죽담에 선 어머니가/아버지 옷을 입고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냐고 소리를 버럭” 지른 것은 그 때문이다. 잡으려 하면 안잡히고 그러면서도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족이다.
그렇다면 학교나 직장과 같은 사회는 또 어떨까. 그러한 집단은 나를 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들의 눈으로 재단한다. 즉 사람들은 대상을 받아들일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인식의 틀에 맞추어 상대를 받아들인다.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예는 직장에서 간 것으로 짐작되는 야유회에서 구할 수 있다.

누가 불러 잠시 다녀온 것도 모두가 야유회를 간다고 하니 누군가 한 명은 당번으로 남아야 하니까 공으로 남 때리는 피구도 싫고 헛발질 잘하는 족구도 못해서 내가 남겠다고 했을 뿐인데 남아서 텅 빈 사무실의 텅 빈 의자에 한 번씩 앉아가면서 그들과 수건돌리기를 하며 놀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혼자 데이트를 즐겼다 수군거리고
—「그림자들의 야유회」 부분

시인의 말에 따르면 한번은 그가 회사 야유회에 가질 않았다. 이유는 야유회가 자신에게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다행스럽게도 “누군가 한 명은 당번으로 남아야 하”는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남은 뒤 심심했는지 혼자 놀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시인의 그 현실은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수용되질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식으로 시인을 재단하여 “혼자 데이트를 즐겼다”고 ‘수군거’린다.
타인들의 인식은 종종 그렇게 나를 빗나간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뒤풀이에서 “커피가 다 식어 리필을 부탁했을” 때 종업원이 딸기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잘못 가져온 것이었고 그렇게 빚어진 실수 앞에서 “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지만 딸기는 잘 먹는 편이라 맛을 조금 보았더니 생각보다 맛이 있어 계속 먹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혼자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는다 눈치를” 준다. 바로 그것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타인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방법이다.
우리는 함께 야유회를 즐기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상의 실체를 지워버리고 우리의 인식으로 재단한 대상과 야유회를 하는, 말하자면 「그림자들의 야유회」를 즐기고 있다. 그릇은 그곳에서 내 삶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릇에 맞게 내 삶을 자르고 재단한다.
그런 측면에서 삶은 거대한 어항과도 같다. 투명하게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투명성이 어항의 가장 큰 특징같지만 사실은 삶이 그 틀을 벗어나질 못한다는 구속성이야말로 어항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 틀은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삶을 그곳에 가두어 놓고 있다. 가둘 뿐만 아니라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기까지 한다.

투명한 어항은 무엇이든 다 지나간다
그 어떤 루머도 어항을 지나면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어항에게 생긴 일」 부분

루머도 지나가고 나면 사실이 되는 왜곡과 은폐의 공간이 바로 우리의 삶을 담고 있는 세상이다. 이 때문에 삶은 모든 것이 눈앞에서 확연하게 벌어지고 있는데도 종종 “사방이 캄캄”해지는 어둠에 처하며 “대낮처럼 어둡고 명징”한, 즉 대낮인데도 어두운 모순의 세계이다.
삶은 왜 이렇게 전개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암울할 정도로 비관적이다. 그것은 어떤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구조 자체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갖고 있는 어떤 인식의 틀로 대상을 재단하여 받아들이고, 그 인식의 틀이 종종 대상을 왜곡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을 나간 어머니가
옷을 뒤집어 입은 채 돌아왔다

배달된 상자를 뜯자
검은 넥타이가 나왔다

일곱 개의 밥그릇에 생쌀을 담는데
마지막 그릇의 뚜껑이 닫히지 않는다
—「배후」 전문

시인이 우리에게 던져놓은 것은 사실은 집을 나갔던 어머니가 옷을 뒤집어 입은 채 돌아왔다는 것 뿐이며, 배달된 상자를 뜯자 검은 넥타이가 나왔다는 것이며, 생쌀이 담긴 밥그릇의 뚜껑이 닫히질 않는다는 것 뿐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 구절을 마주한 우리들의 머리 속은 시인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로 넘어간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덜컥 어머니의 외도를 의심스러워하며, 검은 넥타이와 뚜껑이 닫히지 않는 그릇을 불길한 징조로 삼아 내일의 일진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시인은 시의 제목을 「배후」라고 붙여놓고 있지만 사실 배후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만약 옷을 뒤집어 입고 들어온 어머니 옆에 어머니는 찜질방이나 목욕탕에 다녀오는 길이었고, 나이가 드신 뒤로 가끔 옷을 뒤집어 입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내막으로 덧붙이면 이 장면은 아주 일상적 풍경의 하나로 돌아가 버린다. 검은 넥타이 또한 그 넥타이의 옆에 상가집에 갈 때 사용할 검은 넥타이가 없어 인터넷 쇼핑몰에서 그것을 하나 구입했다는 설명을 덧붙이면 그것 또한 불길한 징조를 걷어내고 그냥 평범한 일상의 하나로 돌아가 버린다. 닫히지 않는 그릇은 오늘 따라 그릇에 쌀을 너무 많이 담았다고 하면 그 또한 눈에 띄지도 않고 지나갈 평범한 일의 하나가 되어 버린다.
시인은 배후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우리는 시인이 말해주지 않는한 그 전후의 맥락을 알 수가 없다. 이 경우 우리는 눈앞의 현상에서 한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타인의 일일 때 눈앞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두고 그곳에서 머물지 않는다. 아니 우리는 전후를 묻지 않고 우리들 스스로가 그 전후의 맥락을 채워넣고 만다. 대상의 배후는 대상이 갖게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대상의 「배후」가 된다. 우리는 알고 보면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포로이다. 시인은 배후를 말하지 않고 있지만 사실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가 그 배후라고 말하고 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러한 인식이 개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우리들의 이러한 왜곡된 인식은 폭넓게 퍼져 나가 사회적 허상을 만들어내고 결국은 그 사회적 허상에 사로잡히기에 이른다. 김점용은 “명상을 시작한 지 삼 일 만에 공중 부양을 했다”고 말한다. “광릉수목원 아래 별장의 별채에 세 들어 살 때 반가부좌로 명상을” 했는데 “머리가 거실 천장에 닿아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고개가 앞으로 꺾”일 정도로 공중 부양을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이 얘기를 하나의 실상으로 믿어줄까? 아마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이를 어떤 시적 은유로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공중 부양을 꿈꾸고 있다. 그 공중 부양의 꿈을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가 타워팰리스라는 초호화 건물이다.

인사동 여자만에서 만난 한 시인은 몸이 아파 술을 못 마셨다 제대로 된 의자에 앉지도 못해 낚시용 접이의자를 따로 갖고 다녔다 그에게 진지하게 명상을 권했다 그가 정말로 명상을 열심히 하는지 이따금 그의 집 타워팰리스가 공중에 붕 떠 있다
—「타워팰리스의 공중 부양」 부분

사람들의 눈엔 타워팰리스가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세상에 뽐내며 높이 솟아 있는 성공의 표상이겠지만 시인의 눈에 타워팰리스는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공중 부양의 얘기처럼 허공에 붕 떠 있는 허상이다. 마치 검은 넥타이에서 불길한 징조를 만들어낼 때처럼 우리들은 그렇게 타워팰리스를 통해 성공한 삶의 허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무섭기 짝이 없다. 너무 실상처럼 보여 그것의 허상을 간파해내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공중 부양 얘기는 사실은 시적 은유가 아니라 현대적 삶의 실상이다. “한 층 한 층 허공을 들어올려도/위로 받을 바닥이 없다는 것/더 이상 기댈 높이가 없다는 것”(「타워 크레인」)이 바로 우리가 쫓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삶이다.
문제는 그 사회적 허상을 동력으로 굴러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삶이 너무 끔찍하여 생명이 미울 정도라는 것이다. 시인이 이의 예로 들려준 얘기는 ‘뱀상어’ 얘기이다. “뱀상어는 몸속에 알을 낳”으며 “그 안에서 부화한 새끼들은” “서로를 잡아먹”으며 성장을 한다. 그 과정은 “최후로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반복된다. 시인은 그 끔찍한 세계를 자신에게로 고스란히 옮겨온다.

내가 살아남은 데도 다 이유가 있다.
—「생명이 밉다」 부분

이런 차원에 서면 생명은 축복이 아니라 사실은 치열한 경쟁에서 끔찍한 죽음을 딛고 이루어진 것이며, 그런 측면에선 저주에 가깝다. 그러나 그 저주는 사회적 허상에 기초하여 삶을 쌓아올리는 우리의 세상에서 성공으로 포장되어 오히려 정당성을 갖는다. 그것은 우리들이 버려야할 것이 아니라 손에 넣고 싶은 욕망이 된다. 물론 김점용은 그와 반대이다. 삶을 묻고 그 물음의 끝에서 삶의 실상에 눈뜬 시인은 오히려 그 「생명이 밉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 지점에서 피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 우리가 삶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과의 연을 끊고 완전한 고립을 선택할 수도 없다. 우리는 어차피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홀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자동차가 달리는 간선도로 옆에 자전거 길이 있고/자전거 길 옆에 붉은 조깅 코스가 있”고, 또 “조깅 코스 옆에 노란 장다리 밭이 있”고, 그렇게 계속 시선을 옮기다 보면 그 끝에 ‘물’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모두 제각각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다. 그 끝에서 물을 들여다보면 물속에서 우리의 얼굴이 흔들린다. 물에 비추었으니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시인에겐 그 흔들림이 처음에는 물결에 의한 흔들림이었을지 모르나 곧 얼굴이 물결을 흔든다. 실제로 우리가 그렇다. 사회적 허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지만 나중에는 우리가 사회적 허상을 만들어낸다.

흔들리는 얼굴이 물을 흔들고
흔들리는 물이 건너편 풀밭을 흔든다
풀밭은 장다리 밭을 흔들고
장다리 밭은 조깅 코스를 조깅 코스는 자전거 길을
자전거 길은 자동차 도로를 차례차례로 흔든다 일제히 흔든다
—「사고 다발 지역」 부분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를 흔들고 있다. 사고가 많은 지역은 사실은 그 흔들림이 완연한 곳이다. 길이 흔들리니 브레이크를 잡을 수밖에 없다. 시인도 그곳에서 급브레이크를 잡게 되며 “급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얼굴에 흉터가 생긴다”. 그 얼굴은 길인 것 같지만 흔들리면서 그 파장이 주변의 모든 것들로 퍼져나가는 세상에선 그 얼굴이 곧 내 얼굴이 되고 만다.
김점용에게 있어 우리의 삶은 실제에 기초하여 쌓아올린 안정된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허상에 기초하여 쌓아올린 부실하기 짝이 없는 건물이며, 심지어 수많은 죽음이 깃든 끔찍한 건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삶 앞에서 김점용이 보인 가장 과격한 반응은 “브레이크를 밟”고 “이쯤에서 멈추고 싶”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하면 ‘헛것들’(「정신병원 지나며」)이 모두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꿈꾸지만 그러나 갈 수 없는 길이다. 아울러 그건 시인이란 작위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에겐 다른 길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김점용이 열고, 그렇게 그가 열어 우리에게까지 열어준 길은 아주 단순하게 열린다. 그것은 바로 눈을 감는 것이다. 오해마시라. 눈을 감는다는 것은 삶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우리가 삶으로부터 눈을 돌린단 말인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현실 앞에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현실 속에선 눈을 감아보기도 어렵다. 때문에 눈을 감아보려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의 공간이 되고 있는 도시에선 그것이 어려울 수 있다. 시인도 눈을 감을 때는 자연을 찾고 있다. 그리하여 자연을 찾은 시인은 눈을 감는다. 아주 단순한 방법 같지만 이 방법의 효과는 놀랍기 그지 없다. 보지 못하게 되면 세상이 닫힐 것 같은 데 눈을 감자 놀랍게도 귀가 열리기 때문이다. 보시라.

눈을 감으면
귀 하나가 한없이 커져
어느깊은 산속 떡갈나무 이파리
그 여린 숨소리를 듣네
—「눈을 감으면」 부분

눈을 감는 것이 효과가 있자 그는 아예 옷을 홀딱 벗고 알몸으로 계곡에 앉아 눈을 감는다. 그것도 그 자신만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꽃과 바위의 눈을 감기고/나무들의 눈을 감기고/흐르는 시냇물의 눈을 감”긴다. 실제로 눈을 감은 것은 그일 뿐이지만 그러나 그는 자신이 눈을 감으면서 세상의 눈을 감긴다고 말한다. 그것은 집중을 위해서이다. 생각해보라. 세상이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그를 지켜보고 있는데 그만 눈을 감고 있다면 그것은 눈을 감고 세상을 열기보다 세상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이 되는 결과만을 갖고 올 것이다. 그러니 자신만 눈을 감아선 소용이 없다. 세상의 눈도 함께 감겨야 한다. 그렇게 하여 눈을 감고 집중을 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러기를 한참
집중으로 집중을 넘어선 순간
어느덧 내 몸이 투명해지며
삼라만상이 저절로 들고 또 났습니다.
—「관음증」 부분

한 때 시인에게 세상은 빠져나가고 싶어 몸부림치던 그릇이었으나 눈을 감고 새롭게 연 세상에선 오히려 그가 그릇이고 세상은 그에 담긴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소리를 타고 와서/소리를 타고 사라진다는 것을” 안 뒤로 이제 세상은 눈을 뜬 뒤에도 예전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새롭게 열린 세상에선 “올라가는 길이” 곧 “내려가는 길이기도 하”(「천축사」)며, 그렇게 시인은 세상에서 길의 방향을 지워 오직 위로만 치솟던 삶의 욕망을 손에서 놓아 버린다. 그러자 헛것이 덮고 있던 값진 것들이 시인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살아가는 세월은 1년을 단위로 끊어지지만 그 1년이 실제의 1년은 아니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1번 공전하여 제자리에 올 때까지”의 시간이 실제의 1년이며, 우리가 말하는 1년에선 “5시간 48분 46초”의 ‘우수리’(「우수리」)가 남는다. 그것은 우수리이지만 버려지지 않는다. 그 우수리를 잘 모아 몇 년에 한 번씩 우리의 1년에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우리의 시간은 온전해진다. 우수리를 버리지 않고 잘 모으고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온전한 세상이다.
꽃잎을 관찰한 시인은 꽃잎들이 “기이한 순열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꽃잎은 일종의 질서를 갖고 있었으며, 그 질서 속에서 “데이지꽃”은 “89개의 꽃잎을” 갖는다. 시인은 데이지꽃이 “그 순열에 맞춰 피려고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와야 했을까”를 물으며 그 질서에 감탄하는 한편으로 “그러다가 드문드문/여든여덟 혹은 아흔 개의 꽃잎으로” 필 때가 있지 않을까를 동시에 묻는다. 그래도 그것 또한 분명 데이지꽃일 것이다. 김점용은 그렇게 핀 데이지꽃에서 “정박아나 자폐아”(「어떤 데이지꽃」)의 자리를 본다. 우리는 질서를 벗어나면 사회로부터 밀어내 버리려고 하지만 꽃의 질서는 질서를 벗어난 꽃마저 그 질서 속에 함께 서 있다.
시인은 스스로를 반성도 한다. 하늘을 쳐다보며 “별과 별이/별과 별의 중력에 끌려/미세하게 항로를 바꾸는 섭동(攝動)”의 움직임을 본 시인은 그동안 “한 틈도 내주지 않으려 했던/스스로”(「섭동」)를 돌아본다. 반성을 했으니 아마도 시인의 마음에서 한 틈이 열렸을 것이다.
그러자 그 틈을 한 소년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 소년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주머니 깊이 두 손을 찌르고”는 ‘껄렁껄렁’ “불량한 걸음걸이로 나를 향해”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치”며 “날 고의적으로 들이받고 지나”간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버르장머리없는 요즘 어린 것들로 치부하지 않는다. 시인은 “누구나 저럴 때가 있는 법이지/굴러다니는 빈 깡통을 콱 찍어 차버리듯/세상을 온통 찌그러뜨리고 싶은 시절”(「한 소년이 지나갔다」)이 있는 법이지 하며 그 삶을 받아준다.
그리고 세상엔 이미 세상을 열어놓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면 허상의 세상을 밀어내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갔는데 아직 멀었”다며 “그냥 돌아가라”고 하는 미용사도 그런 사람이다. 그 “미용사는 드라이를 대충 해주고는/보던 신문을 다시 집어”들었으며 돈은 받지 않는다. “자연의 주인들”처럼 “어떻게든 제자리를 지켜내는”(「뱀이 나오는 가게」) 사람들이다. “망망대해 출렁이는 바다에 매달려” 살다 “보름이나 달포 지나 뭍에” 올랐을 때 “가만히 있는 육지가 흔들려/어질어질 가멀미를” 하고, 그래서 “발 디딘 땅이 거대한 물너울처럼 자꾸 울렁거려/살아도 산 것 같지 않다고/서둘러 마시고 함께 흔들려야/비로소 살아 있는 목숨 같다”며 술을 속에 들이붓는 ‘통영 다찌집’의 ‘뱃사람들’(「통영 다찌집」)도 그런 사람들이리라.
타워팰리스의 세상에서 허상을 벗기고 그런 사람들의 세상으로 내려가 삶의 실상을 보는 것은 어찌 보면 시인의 숙명이다. 그 숙명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깊은 산 등산로”의 “한가운데 서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느라 닳고 닳은 나무줄기의 반질반질한 맨살에 새겨진 글자 은주”를 보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그것을 누군가의 낙서로 버려두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이름을 “남몰래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이름인지 이파리를 죄다 몸속으로 숨긴 그 나무의 이름인지 파란만장한 푸른 잎물결 속에 숨은 빈 배의 이름인지”를 궁금하게 여기며 “한참 동안 나무 주위를 맴돌다” 가슴에 넣어갖고 돌아온다. 허상에 사로잡힌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쓸 데 없는 ‘잡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낙서로 버려두지 않고 세상의 놀림감이 될지라도 가슴에 품고 키워가는 것이 시인의 숙명이다. 그건 사실 허상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사실 소도 놀릴지 모를 일이다.

한밤에 부엌 냉장고 돌아가는 소릴 들으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깔고 앉을 때나 강원도 깊은 산골에 두꺼운 방석을 펴면 이따금 귓전에 울리는 소 방울 소리가 메롱메롱 은주, 하고 날 놀리는 것 같아 평생을 그렇게 놀림 받으며 살 것만 같아
—「메롱메롱 은주」 부분

“평생을 그렇게 놀림 받으며 살 것만 같”은 시인의 숙명은 그렇게 미리 예견되어 있었다. 그것은 어찌보면 바로 세상에 그가 눈을 감고 소리로 연 세상, 즉 시의 세상을 세상에 쥐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메롱메롱 은주」는 시인으로서 그가 걸어갈 삶에 대한 예감같은 것이었다.
그 예견된 삶의 끝에서 그는 “갯가 촌놈들”인 친구들과 어울린 끝에 함께 홍등가를 찾고 “붉은 등불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지만 시인은 그 곳에서 몸을 섞는 대신 “김중식의 시집을 꺼내 라이터 불로/「식당(食堂)에 딸린 방(房) 한 칸」을 축축하게 들려주”고 그 뒤에 그녀로부터 “묻지도 않은 먼 고향 얘기며 가족, 팬시점 주인이라는 장래 희망을 나직나직” 듣고 있다. 그러고 나서 그곳을 나왔을 때 먼저 나온 친구의 “짜식, 디게 오래 하네”라는 힐난 소리 앞에서 그가 올려다 본 하늘에는 달이 하나 걸려있었다.

그녀에게 시집을 안겨주고
삐걱삐걱 목조 계단의 불안한 음계를 따라 나와
툭 터진 하늘 올려다볼 때
먼저 나온 친구 녀석 퉁명스럽게
짜식, 디게 오래 하네
그래 임마, 저 달도 나한테 걸리면
오늘 밤 못 진다!
먼 저 달
—「먼 저 달」 부분

그가 사는 세상은 대낮에도 어두웠으나 이제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세상은 한밤중에도 조금은 훤했으리라.

3
시는 물음이라기보다 대답에 가까울 때가 많다. 그러나 그 대답은 물음을 내포한 대답일 때가 많다. 나는 김점용의 시가 삶에 대한 물음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삶은 무엇인가를 질문으로 내세우고 그의 두번째 시집을 마치 그에 대한 대답처럼 읽어나갔다. 그 대답 속에서 삶은 우리가 잡으려고 하면 비어있고, 나를 살려고 하면 오히려 우리를 가두고 속박하는 그릇이었으며, 그 그릇 속에서 세상은 헛것이었다. 어떻게든 그 헛것의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가 선택한 길은 눈을 감고 소리로 세상을 다시 여는 관음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소리로 열자 이제 세상이 그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이 세상을 송두리째 버리고 싶거나 빠져나가고 싶은 사람이 왜 없으랴. 그런 사람이 있다면 김점용의 권유를 따라 눈을 한번 감아보시라. 그리고 소리로 세상을 열어보라. 그럼 세상이 우리 앞으로 전혀 새롭게 열릴지도 모른다.
(김점용, 『메롱메롱 은주』, 문학과지성사, 2010, 시집 해설)

8 thoughts on “눈을 감고 소리로 여는 관음의 세상 — 김점용 시집 『메롱메롱 은주』

  1. 김점용시인의 시집 ‘메롱메롱 은주’를 읽다가 김동원님을 알게되었답니다. 시를 쓰는 시인들도 범상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어려운 시를 해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런 능력을 가지려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공부를 해야 가능한가요? 문학과 지성이란 단어의 조합에 공감하며 질문드립니다. 지성인이 되고싶은 문외한이 여쭙니다. 덧붙여서 김점용시인의 해설을 쓰는 데는 대략 몇시간 정도 소요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참고로 저는 의학을 전공한 56세 남성입니다.

    1. 저는 사실은 경제학과를 나왔어요. 그래서 문학을 따로 공부한 것은 대학 때 교양으로 문학개론을 한 학기 들은 것이 거의 전부예요. 문학을 대하는 제 사고도 경제학에서 형성이 된 듯 싶어요. 의학을 전공했다고 하시니 의학을 문학과 잘 이어보시면 독특한 읽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제가 좋아하는 오규원 시인은 법대를 나왔어요. 언젠가 법대를 나온 것이 문학을 할 때 영향을 미쳤나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법이 법률 용어의 개념을 아주 정밀하게 정의하곤 하는데 시도 자기 개념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시더라구요. 문학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궁극의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공통 분모란 생각이 많이 들어요. 시집 해설은 두 달 정도 기한을 두고 청탁이 들어왔는데 제가 두 주 정도 더 연장했어요. 틈틈이 한 열 번은 읽어본 듯 싶습니다.

    1. 선배가 되다 보니.. 아무래도 애정이 더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쓰면서 그런 생각은 좀 들긴 해요. 이거 너무 내가 노골적으로 애정을 드러내는 거 아닌가하는. 우린 애정을 피해갈 수가 없는 사람들 같기도 하고…

  2. 저 김정용 시인이 시립대를 나온 분이라면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저 양반도 저도 등단을 하기 전 대학 4학년 때인가 3학년 때 본 사람이 맞는 거 같아요.
    제 여자 친구의 같은 학과(국문과) 선배였었던 거 같은데…
    점용이 형 점용이 형 하는 얘길 들었어요. 술도 한 번 한 것도 같고요…그 분일까?

    1. 경남 하동에 가서 박남준 시인을 만났는데.. 서울에서 김주대 시인을 가끔 봤다고 했더니 같이 술 한잔 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다들 인연이 얽혀 있는 거 같아요.
      김점용 시인은 제 후배예요. 학교 후배들 중에 유난히 시인들이 많아서 가끔 술을 한잔씩들 하곤 하죠. 시립대 국문과는 맞습니다. 아, 저는 국문과 출신이 아니예요.

  3. 요즘 시가 대세인가봐여. 좋네요..
    배고픈 직업이라는 시인. 항상 그렇지만은 않겠지여?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시를 읽고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오블에 또 시인분들이 많아서 더 그런가..ㅋㅋ
    사진도 그렇고…음..글도 만화도…어흥흥..오블에는 없는 분이 없으시네…
    의술…에서..쎄련된 체게바라 사진작가님에서 .ㅋㅋ 저같은 업자까지.

    1. 시인이 배고픈 직업은 분명한 거 같어요.
      대신 시인에게는 시가 있으니까.
      내가 시집을 사도 시는 시인의 것이더라구요.
      영원히 자신의 것인 시가 있으니까 가난하지는 않은 듯 싶었어요.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느낀 건데… 제일로 부러운 것은 예쁘고 멋진 업자더라는. 게다가 영어까지 잘하면 더 부럽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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