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몸을 얻다
—한창민 사진전 「지난 일년」
1. 세 가지의 의문
한창민은 스스로를 가리켜 민스타그래머(M_instagrammer)라 칭한다. 인스타그램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란 뜻일 것이다. 성대신 이름의 맨끝자를 가져다 그만의 독특한 호칭을 만들어냈다. 인스타그램은 사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SNS의 하나이다. 사진 중심의 트위터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그는 2012년 한해 동안 아이폰으로 무려 1만여장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중 3500장 가량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사람들과 나누었다. 그 사진들은 공유 기능을 통해 트위터에서도 사람들을 만났다.
그가 그동안 올린 인스타그램의 사진 중 일부를 골라 사진전을 열었다.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 꾸준하게 그의 사진을 접해왔던 나로서 사진전 소식을 들었을 때 세 가지 의문이 머리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휴대폰과 일반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단순한 기계적 처리 성능의 차이를 떠나 어떤 또다른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이 첫번째 의문이었다. 과연 그의 사진은 어떤 것들일까. 그의 사진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이는 사진 앞에서 우리들이 갖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다. 어떤 사진에 대해서도 이 질문을 버릴 순 없다. 의문은 계속되었다. 왜 하필 인화하여 사진전을 연 것이었을까. 이것은 마지막 세번째 의문이었다. 나는 그 의문들의 답을 구해보고 싶었다.
2. 전화 통화로서의 사진
한창민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의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어떤 통화기록이 아닐까.
카메라는 카메라이다. 그것은 사진을 찍는 기기이다. 카메라는 대상을 이미지로 기록하려 든다. 하지만 휴대폰은 카메라의 기능을 부수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일단은 그에 앞서 전화이다. 전화는 기록하려 하지 않는다. 전화는 통화하려 한다. 그렇다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와는 달리 대상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카메라의 눈앞에서 세상은 풍경이나 장면으로 지나간다. 전화기를 든 사람의 눈 앞에서 세상은 누군가와 나눌 이야기로 지나간다. 그에서 더 나아가면 카메라를 든 사람의 눈앞에서 세상은 풍경과 장면이지만 전화기를 든 사람 앞에서 세상은 우리에게 건네는 어떤 소통으로서의 대화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한창민의 사진은 사진이기 이전에 먼저 어떤 통화일 수 있다. 한강에 점을 내리고 빛의 꼬리를 내린 가로등, 쏟아지는 눈, 미용실의 문을 반쯤 열고 포즈를 취해준 아주머니 등등 그의 사진은 모두가 어떤 이미지의 기록이라기보다 통화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전화는 발신음으로 전화가 왔음을 알린다. 그렇다면 세상과 휴대폰으로 소통한 것으로 보아 그가 사진을 찍을 때 세상은 그의 눈에 시각적 발신음으로 울린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발신음을 귀에 한정하고 있을 때 그는 시각 세포를 울리는 발신음을 포착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의 사진은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 것인가. 혹시 사진에 귀를 갖다 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하면 사진에 담긴 통화 내용을 고스란히 엿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가능할 듯하다. 사진은 입이 없어 전혀 말을 못하지만 통화의 또다른 당사자는 입을 갖고 있는데다가 말도 아주 잘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은 사진만 볼 것이 아니라 사진에 귀를 대고 통화를 엿들어야 한다. 그에겐 사진이 세상과의 통화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창민에게 많이 물었고, 그는 친절하게 통화 내용을 답했다.
3. 대상이 털어놓은 세상의 속 얘기
이제는 한창민의 사진을 들여다볼 차례이다. 하지만 미리 말했듯이 그의 사진은 사진이 아니다. 그의 사진은 사진으로 찍힌 대상과의 통화 기록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동시에 텍스트가 아니라 분명히 사진이다. 그러니 그의 사진은 사진임과 동시에 얘기이다. 사정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의 사진을 제대로 보려면 보면서 들어야 한다. 나는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와 대상이 나누었음직한 내밀한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 중에서 몇 가지의 사진에 대해서만 얘기를 해보기로 한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달 사진을 찍었다. 그것도 속을 꽉채운 둥근 보름달이다. 혹시 그에게 달에 대한 편집증이 있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는 달 사진을 많이 찍었다. 하지만 오해마시라. 그 달은 그 달이 아니다. 그에게선 세상의 둥근 것은 모두 달이었다. 오래전 조선시대엔 하늘에 떠 있는 단 하나의 달이 세상의 모든 강으로 내려와 천 개의 달이 되었지만 한창민의 세상 속에선 여전히 단 하나 뿐인 그 하늘의 달이 이 세상의 모든 둥근 것들 속으로 내려와 수없이 많은 이 세상의 달이 되었다. 때문에 그의 사진 속에선 둥근 접시도 달이고, 둥근 알전구도 달이다. 왜 그에게서 세상의 모든 둥근 것들은 그 안에 달을 품게 된 것일까. 아마도 시대가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밝은 해로 길을 밝히기가 어려운 시대라는 얘기이다. 몸을 숨겨주면서도 길을 열어주는 빛이 필요한 시대엔 달이 그 몫을 떠안게 된다. 한창민이 용케도 그 달의 얘기를 들었다. 세상의 둥근 것들이 모두 그에게 속삭인 것이 분명하다. 내 안에 달 있다고.
세상의 둥근 것들이 형태를 빌어 달을 잉태했다면 한창민에게선 색이 남다른 속 얘기가 될 때도 있다. 가령 「붉은 벽_용산」은 사진으로만 보면 붉게 칠해진 벽 위에 걸쳐 있는 나뭇가지와 그 나뭇가지에 달린 몇 개의 초록색 잎들이다. 하지만 그것의 속얘기가 특별해지는 것은 용산이란 제목 때문이다. 붉은 벽은 용산이란 제목과 결합되는 순간 붉은 벽이 아니라 붉은 불길이 되고 만다. 자본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고자 세상을 붉게 태워버리려 드는 파괴적 욕망의 불길이다. 실제로 그 불길이 사람의 목숨을 집어 삼킨 일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그의 사진에서 붉은 벽은 벽이자 불길이다. 그것은 막으면서 태워버리려 한다. 그러나 한창민의 사진은 그 불길의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을 전하기 보다 그 불길마저도 이겨내는 생명의 힘을 붉은 벽 앞에 걸어둔다. 붉은 벽 앞의 푸른 나뭇잎이 바로 그 생명이다. 때문에 붉은 벽의 사진에선 그가 전하고자 하는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결국은 생명이, 세상을 돈으로 삼키려는 자본의 화마를 이길 것이라는.
색은 또 남과 북이 되기도 한다. 그의 사진 속에서 시상식을 위하여 골프장에 깔아놓은 카페트와 잔디는 사진의 절반을 각각 붉은 색과 초록색으로 나누어 갖는다. 그리고 그렇게 색을 절반씩 나누어 가지자 붉은 색은 북이 되고, 초록색은 남이 된다. 분단의 땅을 살지 않았다면 사진의 공간을 절반씩 나누어 가진 붉은 색과 초록색이 「남과 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진의 절반씩을 차지하며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이웃이 되지 못하고 서로 갈라진 「남과 북」이 된 것은 그가 분단의 땅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의 땅을 사는 우리에겐 색도 색으로 있지 못하고 남북으로 갈라선다.
그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고흐의 그림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기 위하여 꼭 그 그림 앞에 서야 할 필요는 없다. 때로 한강의 가로등 아래로 그 그림의 일부가 걸리기도 한다. 한창민의 사진 「고흐 한강」이 바로 한강에 걸린 고흐의 그림을 포착한 사진이다. 사진은 물론 고흐의 그림을 온전히 옮겨오진 못한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한 화가의 그림이 그림에 갇혀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림은 그림 속을 나와 우리의 세상 한가운데 걸리기도 한다.
그림만 그림을 걸어나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 한권의 소설이 제목을 버리고 세상으로 뛰쳐나오기도 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단순히 종의 사진이 아니다. 한창민은 소설의 제목이 소설 제목으로 갇혀살다가 어느 날 그 구속이 답답하여 세상으로 뛰쳐나왔으며, 그렇게 하여 새롭게 얻은 정착지를 발견했다. 새로운 정착지를 찾을 때까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 사연을 들어줄 이가 나타났을 때 종은 정말 반가웠을 것이다. 그가 종의 사진을 찍던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때로 그의 사진에서 다른 사진 작가가 어른거릴 때도 있다. 가령 그는 비내리는 날의 차창에 어른거리는 나무를 찍고 「비나무」라 명명했지만 그 사진을 본 순간 내 머리 속을 스쳐간 것은 제주의 바람을 찍고자 했던 김영갑이었다. 김영갑의 사진 이미지가 어른거린 순간, 한창민의 사진속 비는 비가 아니라 비가 꿈꾼 바람이었다. 왜 비는 바람을 꿈꾼 것일까. 아마도 세상을 적시는데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적시기 보다 세상을 뒤흔들고 싶지 않았을까. 비가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을 적시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적시는 것만을 할 수 있는 자는 가끔 바람처럼 세상을 뒤흔들고 싶어진다. 김영갑이 나무를 찍으면서 사실을 바람을 찍으려 했다면 한창민은 비를 찍으면서 사실은 비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바람의 꿈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이 분명하다. 난 비나무에서 바람 소리를 들었다.
한창민의 사진은 그에게 수신된 어떤 통화의 기록들이다. 때문에 사진이 모두 어떤 속 얘기를 갖고 있다. 그 얘기는 곧바로 들리진 않는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얘기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아주 속깊은 얘기들을 들으려면 더욱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예술 작품이 그렇듯이 그의 사진도 한창민에게 털어놓지 않은 얘기를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특별히 속삭일 수도 있다.
4. 이미지와 사진
이제 마지막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해야할 차례이다. 인터넷으로 사진을 올려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에서 사진을 나누던 그가, 그 현대적인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잘 소통을 이루어왔던 그가, 왜 하필 그의 사진들을 굳이 인화를 하고 그 사진들을 사진전이란 형식 아래서 완전히 옛날 방식으로 사람들과 나누려 한 것이었을까.
그는 인터넷에 올린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이미지라고 했다. 그 이미지들은 인화지에 인화했을 때 비로소 사진이 된다고 했다. 그의 얘기가 아니라 인화를 해준 현상소의 누군가가 그 얘기를 했고, 자신은 그 얘기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 그러니까 이미지와 사진은 다른 것이라는 이야기에서 이미지와 사진의 구별선을 좀더 선명하게 긋기 위하여 나는 이미지와 사진을, 사진과 존재로 바꾸었다. 사진과 몸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나의 사진은 나의 사진이지 내가 아니다. 나의 사진은 나를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 나라고 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여 나의 사진을 보고 있는 사람은 나를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나를 직접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몸의 존재로서의 나는 나를 직접 대면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만날 수가 없다. 우리는 사진을 보며 사진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진의 존재, 말하자면 그 사진의 몸을 만나고 싶어한다. 나는 내 사진의 실질적인 몸이다.
이미지와 사진의 관계는 내 사진과 실질적 몸의 존재로서의 나의 관계와 비슷하다. 몸의 존재를 만나면 느낌이 달라진다. 때문에 나는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아이구, 사진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시네요. 당연하지. 당신이 본 그 사진이 언제적 사진인데.
이미지는 아직 몸을 갖지 못한 사진이다. 이미지가 인화지에 인화되면 그때부터 몸을 갖기 시작한다. 이미지가 몸을 가졌을 때 비로소 그것을 사진이라 부를 수 있다. 모든 이미지는 몸을 갖고 싶어한다. 우리가 사진으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이미지는 사진과 아주 유사해보이지만 사실은 몸을 갖고 있지 못하다. 사진은 몸에서 한단계 멀어진 이미지이지만, 디지털 세상의 사진은 사실은 그 사진에서 또 한단계 더 멀어진 이미지이다. 사진은 태생적으로 몸의 존재로부터 멀어지면서 허무함을 기본적으로 타고날 수밖에 없는 장르였다. 그러나 그 허무를 인화지라는 물리적 차원의 몸으로 어느 정도 극복한다. 디지털 이미지는 그 물리적 차원의 몸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런 측면에서 디지털 이미지는 MP3 파일에 비견된다. CD까지만 해도 음악은 물리적 차원의 몸을 갖고 있었지만 MP3 파일의 시대가 오면서 물리적 차원의 몸을 잃어버렸다. 그것이 디지털 세상의 부정할 수 없는 특징이다. 디지털 세상에선 물리적 차원의 몸을 없애고 대신 편리를 얻는다. 사실 몸이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인가. CD를 생각해보라. 좋은 음악을 나누려면 그 CD를 건네야 한다. 몸이 없는 MP3는 그럴 필요가 없다. MP3 파일은 어디로든지 인터넷이 연결된 곳이면 곧바로 전송할 수 있다. 사람들을 깨달은 것이다. 편리하고 빠르게 살려면 몸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사진이 그렇게 하여 우리의 몸으로부터 한발자국 멀어졌고, 디지털 이미지는 서너 걸음 멀어졌다. 우리는 매우 편리한 세상을 살게 되었지만 그때부터 동시에 많이 허무해졌다. 몸을 잃은 자들의 허무였다.
한창민이 굳이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에서 나누던 사진들을 인화하는 수고를 거친 끝에 전시회장에 걸어 사진전을 갖고 싶었던 것은 몸을 잃어버린 사진들에게 몸을 찾아주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진은 그렇게 보면 몸으로 서너 걸음 멀어진 이 시대에 다시 몸으로 가까이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리하여 나는 몸을 얻은 이미지의 세상, 바로 사진의 세상을 찾아가 보았다. 이미지와 사진은 과연 다를까. 「오늘 햇빛은 비 현실적으로 따갑고 뜨거웠지. 모든 걸 살해할 듯이. 풍경도 만화처럼 만들었어」라는 이미지를 대했을 때 내가 처음 느낀 것은 비온 뒤끝의 맑게 개인 날이었다. 그 이미지가 몸을 얻자 구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구름은 부풀어오를 듯한 느낌으로 가장 먼저 내 시신경을 자극했다.
이미지로 접했을 때 「각선 미인」의 다리는 너무 매끈하여 날이선 느낌이었다. 손을 대면 손이 베이지 않을까. 그러나 사진 속의 다리는 매끈함을 내놓고 느낌을 부드럽게 이완시켜놓고 있었다. 이미지 속의 다리는 나의 본능을 자극했지만 사진 속의 다리는 여자가 누구일까 궁금하게 만들었다. 다리만 눈에 들어왔던 여자가 체온의 존재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몸은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 몸의 세상에 한창민이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전시장을 들어설 때마다 일어서서 관람객을 반기는 그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Welcome to the real world!
체구가 건장한 모피어스를 상상하지 마시라. 매트릭스를 막 빠져나와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을 반겨주는 한창민은 체구가 호리호리하고 몸의 어디에서도 군살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몸의 세계는 많이 다르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몸의 세상에서 작가와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늦은 밤에 몸을 그곳에 버려두고 나는 다시 거대한 매트릭스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이 편리한 세상을 떠도는 알 수 없는 허무의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허무함이 많이 덜했다. 가끔 몸의 세상을 찾으면서 나는 이 세상을 잘 견뎌갈 것이다.
**사진전은 다음의 일정으로 열리고 있다
-사진전: 한창민 사진전 『지난 일년』
-전시 기간: 2013년 3월 1일(금) – 3월 17일(일)
-전시 장소: 서촌갤러리(서울시 종로구 효자동 40-2. 두오모 2층)
-개관 시간: 오전 11시~저녁 8시
8 thoughts on “이미지, 몸을 얻다 – 한창민 사진전 「지난 일년」”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저희학원 블로그에 내용을 퍼가고 싶습니다.
그러세요. ^^
몇 달 전에 저도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을 크게 인화해 전시한 작가의 사진전을
본 적 있는데, 사진이란 게 기기도 중요하지만 작가 정신이 훨씬 중요한 작업이란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이렇게 블로그를 통한 해설을 듣고 가서 보면
A가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 B가 블로그를 통해 해설해 준 정보의
도움을 받아 – C가 눈으로 그리고 머리로 관람하는 게 되겠군요.^^
디지털 시대가 많이 편리하면서도 허무한게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트위터에서 멘션으로 오고가던 작가가 전시회를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해보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일요일날 두 분이 한번 들러보셔도 좋을 듯 싶습니다. 근처에 통인시장이 있어서 거기도 구경할 수 있더라구요.
발상이 새로운 사진전이군요. 사진이 세상과의 통화라고 하는 인상 깊은 말씀. 후반 내일..
보통 카메라로 찍는 사진은 카메라가 사진을 결정할 때가 많은데 한창민의 사진은 보는 사람의 눈이 사진을 결정했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작가가 사진에 많이 개입할수록 예술성이 높아지는데 그래서인지 아주 호감이 가더라구요.
너무 길어서 이해 어려워서 죄송합니다. 카메라와 전화로 촬영한 사진.. 기술과 기능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시점에서 사진이 태어나는 것을 느끼는군요. 작가님과 많이 통화의 대화했는지요? ^^ 많은 사진을 달로 한 작품이 있었어요?친구가 구입해 너무 부럽다!멋진 작품이었지요..
대화를 무지 많이 했어요. 트위터에서도 대화를 많이 나눴구요, 직접 만나서 들은 얘기도 아주 많구요. 그런 얘기들이 사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더라구요. 달의 연작이란 그 작품을 친구분이 구입하셨군요. 저는 작가분이 그 작품에 대해 말한 것과는 좀 달리 봤어요. 작가는 달을 기대고 싶은 품 같은 것으로 생각한 듯 하더라구요. 친구분하고 같이 가서 보시면 아주 좋은 시간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