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계절에 돌아본 시의 세상 – 『문예바다』, 2015년 봄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5년 봄호
『문예바다』 2015년 봄호

1
겨울이다. 나무들이 잎을 털어낸 빈가지로 계절을 나는 겨울은 색이 제거된 흑백의 계절이다. 겨울이 흑백의 계절이란 것은 다른 계절을 살펴보면 쉽게 수긍이 될 수 있다. 봄을 생각해보자. 봄은 진달래의 분홍이나 개나리의 노란색으로 계절을 연다. 그밖에도 봄을 여는 꽃의 색들은 많다. 겨울엔 흰색이 색이 제거된 세상의 가장 밝은 쪽 음영에 불과하지만 봄엔 흰색도 색의 하나가 된다. 흰색을 꽃이 갖기 때문이다. 흰색은 음영의 하나일 때는 색이 아니지만 꽃이 가지면 색이 된다. 여름은 녹색의 지배체제가 두드러지는 계절이다. 그러나 그 계절에도 여전히 꽃들이 그 녹색의 지배체제 사이사이를 다양한 색으로 채운다. 가을은 여름을 녹색으로 뒤덮었던 잎들이 단풍의 색을 가지면서 가장 화려하게 색을 치장하는 시기이다. 가을에는 색을 가진 꽃도 있고, 잎들도 색을 갖는다. 그런 측면에서 가을은 색이 가장 절정에 오르는 계절이다. 색은 꽃만 색을 가졌던 봄으로 계절을 열고 잎의 초록으로 그 색의 세상을 이어간 뒤 꽃과 잎이 모두 색을 가지는 가을로 색의 세상을 가장 폭넓게 확장하며 계절을 마무리한다. 색의 계절은 거기까지이다. 그 뒤엔 모든 색을 버리면서 겨울이 온다. 색을 내려놓았다는 측면에서 그 계절은 흑백의 계절이다.
색은 색 자체로 하나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색이 주제가 되면 우리의 시선은 색으로 모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색이 제거된 흑백의 세상에선 빛이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은 빛의 강약과 방향, 그리고 그 빛이 드러내는 형상과 결에 더 많은 눈길을 주게 되는 계절이다.
가을의 낙엽이 떨어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실을 앓는다. 하지만 알고보면 우리는 중요한 것은 하나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 나무는 여전히 그대로이며, 봄에 꽃을 피웠던 대지도 우리의 발밑에서 그 몸을 빼지 않고 있다. 우리는 겨울이 오기 전까지 너무 색에만 시선을 내주고 살았다. 겨울은 같은 자리에서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계절이다. 우리는 그 계절에 비로소 색의 풍경이 아니라 형상과 결의 풍경에 주목할 수 있다. 흑백의 세상이 만들어내는 미덕이다. 나는 그 계절에 2014년을 마무리하는 계간지의 겨울호와 새해의 첫달을 연 월간지들에 발표된 시를 읽었다. 나는 흑백의 계절에 시의 세상을 둘러보았다.

2
우연찮게 초겨울의 계절 풍경을 보여준 시가 있었다. 길상호의 시였다. 시 전체가 낙엽이 지는 계절의 연못 풍경을 담고 있었다. 사람들이 연못에 떨어진 낙엽을 마주한 자리에서 그는 “날아든 낙엽을 펼쳐들고” “독서에 빠”진 ‘연못’을 보았다고 했다. 그의 눈에 초겨울의 연못에게 가장 서둘러야 하는 작업은 낙엽을 읽는 일이었다.

잎맥 사이 남은 색색의 말들을 녹여
깨끗이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초겨울 가장 서둘러야 할 작업이라는 듯
한시도 다른 데 눈을 돌리질 않았다
—길상호, 「연못의 독서」(『현대시』, 2014년 1월호) 부분

속으로만 읽지도 않는다. 물살이 “중얼중얼 페이지를 넘”기며 “진흙 바닥에 가라앉”은 “무거워진 낙엽을” 읽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연못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오래 그 옆을 지키고 앉아 있어도/이야기의 맥락을 짚어낼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어둑해지는 저녁 시간에 “그림자를 뜯어/수면 아래 가만 내려놓고서/비밀처럼 깊어진 연못을 빠져나왔”을 때 “그날 읽을 것도 없는 나를 넘기다 말다/바람이 조금 더 사나워”져 있었다는 또 하나의 고백을 이으며 시인은 시를 마무리한다. 겨울은 색을 잃은 계절이 아니라 연못이 잎에 남은 색의 말을 다 읽어냈을 때쯤 마치 오래도록 읽은 책의 페이지가 변색되듯 잎의 색이 바뀌는 계절이었다.
계절의 풍경이 시의 전체에 담긴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계절이 언급되거나 암시된 시들은 몇 편 있었다. 그 중에서 시인 조용미는 “당신이 사라진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요”를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가을을 언급하고 있다.

무엇이 사라질 때마다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말하지 않겠소 아름답고 비루하고 쓰라리고 신비한 이 삶을 나는 또다시 살아내야 하는 것이오 섬세한 언어처럼 가을이 내 앞에 다시 왔소
—조용미, 「구름의 서쪽」(『문학과사회』, 2014년 겨울호) 부분

내가 주목한 것은 조용미의 가을이 “무엇이 사라”진 상실의 뒤에 왔다는 점이다. 계절의 순서에선 상실의 몫이 겨울이지만 사람의 삶에선 상실의 순간이 어느 특정한 계절로 고정될 수가 없다. 시인에겐 그 순간의 계절이 가을이었다. 그 가을을 일러 시인은 “섬세한 언어처럼 가을이 내 앞에 다시 왔”다고 했다. 나는 시인이 말한 가을을 세상 풍경이나 삶이 섬세한 언어로 드러나는 계절로 읽었다. 만약 그 언어가 색의 언어가 아니라면 시인이 비록 가을에서 섬세한 언어로 드러나는 계절을 보았다고 해도 실은 그것은 겨울에 방불한다. 계절에 대한 나의 인식 속에선 겨울이 바로 색의 상실 뒤에 빛의 강약과 방향이 두드러지면서 그 빛이 형상과 결의 풍경을 드러내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에게 언어로 섬세하게 드러났던 것은 가을이 그랬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 가을이 상실 뒤에 오면서 겨울과 같은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실은 우리에게 ‘서러움’을 남기지만 그 서러움의 뒤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조용미가 “오래 간직한 낡은 마음”이라 칭한 그 서러움의 계절에 “봄에 다시 새로운 마음이” 될 것이라 예감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예감 앞에서 나도 시인의 봄이 기다려졌다.
이혜미의 시 속에는 어디에도 봄이란 말이 없었지만 나는 ‘목련’이란 꽃의 이름에서 시의 계절을 봄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그 봄은 꽃의 색이 지배하는 계절이 아니다.

내 오래된 침대 위에 고인 흉한 냄새들이여 너에게 입 맞추는 동안 검은 잇몸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사람의 반대편에서 괴사한 공중이 온통 얼룩져내리고
—이혜미, 「목련이 자신의 극(極)을 모르듯이」(『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 부분

나는 이혜미의 시를 읽으며 목련 나무가 가까이 내다보이는 시인의 침대를 상상했다. 시인에겐 꽃피는 시절에 매일 아침 목련을 마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꽃만 보고 지나는 사람과 달리 꽃과 그 꽃이 지는 것을 모두 접할 수밖에 없다. 즉 나무를 가까이 둔 사람은 나무에서 하얀 목련이 피며 ‘흰 계절’이 열렸다가 하룻밤만에 “썩은 목련들로 낭자해”지는 시간을 모두 겪는다. 그리고 꽃이 질 때쯤엔 꽃을 바라보기만 해도 “상한 꽃 냄새”가 났을 수 있다. 침대에 그 냄새가 흉하게 고인 듯한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봄이 색의 계절을 열어도 동시에 그 봄에 색을 잃는 겨울이 이어진다. 시인의 눈에는 목련도 자신의 극, 즉 눈앞의 상실을 모르고 피며, ‘나무들’도 “자신이 가진 초록을 모”른다. 우리가 색의 계절만 고집하면 색 이외에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이혜미는 봄에 피고 지는 목련 앞에서 상실을 읽고 있다. 꽃이 질 때 그가 겨울에 섰다는 얘기이다. 봄에 겨울을 불러 흑백의 음영으로 봄을 보면 삶이 더욱 깊게 열릴 수도 있다. 목련의 극과 나무들이 가진 초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김현의 「이 가을」은 제목과 달리 가을 얘기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알려드리자면 이 가을에 있었던 어떤 얘기이다. 때문에 이 때의 가을은 계절의 하나라기보다 그냥 얘기의 시점에 불과하다. 그럼 시인의 가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현은 “영광식당에서” “구운 삼치를 앞에 두고” 식사를 하고 있던 “늙은/두 사람”을 보았다. 시인의 눈에 두 사람은 부부로 보이질 않았다. 시인이 그 두 사람을 가리켜 “두/남남”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말할 수 없이 다정해 보여 그들이 마치 “입술의 뼈를 맞”대고 있는 듯이 보였다. 입술에 뼈가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너무 다정하면 없는 입술의 뼈까지 맞대고 있는 듯이 보인다. 두 사람은 아마도 “흰밥 위에 흰 살 올려놓기를/주저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발라낸 생선의 살을 건네주었는가 보다. 그 장면을 보고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거기에 늙어 죽겠어가 있다는 듯이
늙어 가는 것에 생명이 있다는 듯이
—김현, 「이 가을」(『문예바다』, 2014년 겨울호) 부분

이 표현에는 어패가 있다. 두 사람은 늙어 죽겠다는 듯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좋아 죽겠다는 듯이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인이 전하는 늙어 죽겠다는 듯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아무리 늙었어도 나이마저 까맣게 잊고 좋아 죽겠다는 듯이라는 표현인 셈이다. 나이는 똑같은 애정 행각을 손가락질받게 만든다. 그러나 시인은 아무리 늙어도 이렇게 살면서 죽겠어에 주목하여 둘의 애정 행각에서 좋아 죽겠어를 빼버리고 그냥 이렇게 늙어 죽겠다는 듯이로 축약을 했을 것이다. 이어진 또다른 표현도 정확히는 ‘도’를 붙여 “늙어 가는 것에도”라고 해야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러나 둘의 애정 행각은 생명이 젊은 것들의 것이라는 일반적 인식을 들이밀기에는 너무 강열했다. 오히려 저 정도면 늙어 가면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을 것이란 얘기이다. 시인의 눈에는 “늙으나 젊으나” 사랑에 “영광이 있다는 듯이” “백반집 연인들”이 “밥을 먹다 말고/손을 냠냠 잡”고 있는 것이 세상이며, 그 세상의 사랑은 “영광식당/공기”의 ‘밥’에 담겨있다.
첫시집 『글로리홀』을 내면서 시마다 주석을 다는 특이한 형식을 선보였던 김현은 이번 시에서도 그 점에선 예외가 없으며, 이번에도 역시 주석이 병렬 배치된 또하나의 시를 이루는 독특한 구실을 한다. 주석 속에서 그는 누군가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를 펼쳤다 접고 있다. 편지가 누군가의 마음을 담는 글이란 점에 대해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지만 독특한 점은 김현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늙은 두 사람을 보며 편지도 일종의 음식이 아니겠냐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편지를 펼쳐서 읽는 행위가 마치 밥을 비우듯 “마음을 싹싹 비”우는 일로 표현되어 있다. 보통은 마음은 마음이고 밥은 밥이지만 그렇게 하여 마음은 ‘밥’이 되고 밥은 또 ‘마음’이 된다. 꼭 편지에만 마음이 담기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거의 대부분 밥에 마음이 담기며 그 때문에 “지금도 식당은 연인들의 손을 연결하고 그것이 오늘 밤 호흡을 책임”지는 몸의 사랑으로까지 이어진다. 나는 같이 밥먹는 것을 우습게 볼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걸음한 시의 세상은 이제 사랑 얘기로 그 풍경을 바꾸고 있었다. 김현이 밥과 편지, 마음의 상관관계를 통해 사랑을 얘기했다면 오은은 사랑할 때의 몸과 마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애인을 사랑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말의 앞이 잘려 있는 관계로 그 애인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는지 누군가를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었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어쨌거나 그 애인과의 사랑은 시인에게선 몸과 마음이 어긋나기 일쑤인 사랑이었다. “말이 앞서거나 마음이 뒤로 숨어/몸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 둘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 애인의 앞에선 “아는 것이 힘이고 모르는 건 약이어서/힘만 장사거나 온종일 약에 취해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몸과 마음의 무게도 균형을 취하지 못해 “몸은 무거운데 마음이 가벼워/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비애도 있었다. 그러다 시인은 “말이 몸을 갖게 되었”으며, 그 결과 “말이 아닌 몸이/몸이 된 말을 하듯/알쏭달쏭한 표정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말이 몸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몸의 행동이나 표정이 곧 말로 해석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들리며, 대개 마음은 말이 실어 나르는데 그 몸이 된 말의 의미가 그렇게 투명하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러자 ‘몸말’이 된 우리들이 “마음을 구하기 위해” 한 일은 “짝짝이 신발을 신”은 것이었다. 아마도 한짝씩 바꿔 신었나 보다. 대개는 이 정도로 맞질 않으면 헤어지는 것을 선택하는 편이지만 시인이 이러한 갈등 뒤에 발견한 것은 그러한 일반적인 귀결과는 다르다.

바깥으로 나가야 비로소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오은, 「애인」(『문학과사회』, 2014년 겨울호) 부분

사랑이란 누군가의 마음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지만 때로 그 노력이 오히려 그 마음의 바깥으로 나오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오은은 그렇게 말한다.
오은에게선 사랑이 둘의 사랑으로 시작하여 귀결도 둘의 사랑을 구하는 것으로 매듭이 되지만 김민정은 다른 궤도를 택한다. 김민정은 사랑에 빠졌을 때의 우리들을 이렇게 말한다.

하트는 이상해
너 주려고 보낸 건데
내 눈이 되어 반짝이지
—김민정, 「망종 —마음이 아주아주 우주1」(『문학과사회』, 2014년 겨울호) 부분

사랑이란 상대에 주려고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나를 빈틈없이 사랑으로 채워 내 눈을 사랑으로 멀게 만든다. 문제는 사랑을 주고 받으려는 그 둘이 잘 맞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내가 비록 너에게 빠져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를 앵두라고 부르지는 마/네 고양이 이름이 앵두라서/내가 앵두인 게 나는 좋겠니/앵두가 싼 계절이라서 나도 싸겠니”라고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둘 사이의 사랑에 불거진 갈등의 하나일 것이다. 결국 그 사랑은 계속 이어지지 못한다. 그러나 김민정은 오은처럼 마무리하질 않는다. 그의 마무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구하기보다 마음에 맞는 상대가 어딘가에는 또 있다는 쪽이다. 시가 “어디에나 고리는 또 있지 않겠나”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마음의 귀결로 보인다. 그는 상대에게 깊이 빠지면서도 발도 잘 빼는 듯한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으리라. 다만 그가 사랑과 그 사랑의 갈등을 경쾌한 보행의 시에 실었을 뿐이고, 그것이 그의 시가 갖는 독특함이란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사랑이 사랑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안내할 때도 있다. 진수미는 이렇게 말한다.

옛사람은 옛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악어가 물속에만 살지 않듯이
—진수미, 「젖어서 아름다움」(『문학동네』, 2014년 겨울호) 부분

사랑은 하는 것도 어렵지만 끝난 사랑을 잊는 것도 어렵다. 옛사랑이 간혹 잊히질 않고 떠오르곤 하며 그때마다 헤어진 사랑의 아픔이 악어처럼 출현하여 나를 물어뜯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옛사랑이 가끔 전화도 하거나 아니면 직접 만나러 오기도 하는가보다. “잘 지냈어?”라는 말이 그런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시인은 그 말에 “당신을 잊으려/바르셀로나로 로마로/스톡홀름으로 헤매다녔어요”라고 답한다. 하지만 시인이 잊으려고 헤매다닌 그 길은 사랑이 아니라 삶 자체로 이어지고 있다. “머리를 구름 속에 쳐박고 있던,” 말하자면 머리 위의 구름에 시선이 팔려 아무 것도 보질 못했던 그는 파리에서 “초대박 변을 지르밟고 말”며, “개똥 밟는 여인”이 된 그 ‘운명’은 서울에서도 반복된다. 그리고 불운 끝에서 “삶이란/누군가 한 번은 밟아야 하는/개똥의 다른 이름”이란 것으로 삶의 실패들을 정리하며 삶으로 돌아온다.
진수미가 헤어진 사랑을 잊으려 떠났던 길을 삶으로 틀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여행의 힘으로 보고 있다. 여행은 우리들의 자세를 바꿔놓을 때가 많다. 내가 그것을 엿본 것은 여행길의 이현승에게서 이다. 그는 여행길에 “물가에 앉아서” “구름이 무심히 강물에 제 얼굴을 비춰보”는 풍경을 앞에 두고 잠시 쉬다 뒤를 돌아본다. 그러자 그 자리에 “구름처럼 눈코입이 지워”진 얼굴이 “하얗게 웃고 있었다.” 아마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놀라지 않고 그 얼굴을 풍경으로 끌어들인다.

풍경을 보고 있는 사람도 풍경이다.
—이현승, 「여행자」(『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 부분

이현승은 사람이 풍경과 조화롭게 화해하고 있는 인간의 자리에서 “헤어지는 사람이 실은 더 연애를 갈구하듯/죽으려는 사람이 가장 살고 싶은 사람이”며 “떠나온 사람들은 집 생각을 한다”고 말한다. 보통은 여행의 미덕을 새로운 것을 보고 듣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사람을 풍경의 일부로 만들어주는 여행은 우리들에게 다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다. 우리가 그 평화로운 여행의 세상에 계속 머물려 들지 않고 우리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도 그 미덕 덕택이다.
그럼 돌아온 우리의 삶엔 평온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삶의 유형은 다양하기 이를데 없지만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 중에 퇴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야근 후의 퇴근길”이 흔할 것이다. 그것은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에 길을 밝힌 가로등의 풍경을 조영석은 이렇게 전한다.

오랜 낮잠에서 깬 가로등들은 적당히
떨어져 서서 게슴츠레 낮에 꾼 꿈을
줄줄 바닥에 쏟고 있다
—조영석, 「인간의 불빛」(『문학동네』, 2014년 겨울호) 부분

가로등의 불빛은 시인의 눈엔 바닥에 쏟아진 가로등의 “낮에 꾼 꿈”이다. 우리는 꿈이 밝힌 길로 집으로 간다. 사무실에도 사람들이 함께 일했을 텐데 그는 집이 있는 마을을 가리켜 그곳에 “인간들이 모여서/불 밝히고 산다”고 말한다.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낼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인간의 세상은 그곳에 있지 않다. 우리는 저녁 때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회사를 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인간의 세상이 모든 삶의 힘겨움을 덜어주는 것은 아니다. “작년 이맘 때 굴참나무 굵은 가지에/목을 맸다는 사내의 주검”이 남긴 슬픈 사연도 그곳으로 가는 ‘비탈’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가족들이 있는 그 마을의 집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사회엔 그 집과 가족의 위안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들이 있다. 정끝별이 전해준 ‘김말해’ 할머니도 그 사람들 중 하나이다. 할머니는 일제 시대 때는 위안부로 “현해탄 너머 끌려갈까” 두려워 “산 산아랫동네로 혼인해” 일찍 결혼을 했다. 그러다 할머니는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여 농성에 나서게 되었다. “늙도록 홀로” 흘렀다고 전하는 할머니의 시대를 정끝별은 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즈그는 법이 있고 우린 무법이라카는데
우리는 억울해도 분을 풀 데가 없다

—정끝별, 「천불 철탑」(『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 부분

할머니는 분명 우리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나 할머니가 사는 실질적 시대는 일제 병탄 시기나 남북이 극렬한 대치로 맞섰던 한국동란 시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정끝별은 할머니의 시대가 여전히 법은 없고 힘만 판치던 옛시대임을 그가 그려내는 시의 세상에서 증명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명목상으로 현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과거의 시대, 그 중에서도 중세임을 말하고 있는 또 한편의 시가 있다. 2014년 4월 16일엔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그 참사는 아이를 잃은 많은 부모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상처의 많은 부분이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로부터 왔다. 부모들은 청와대를 찾아가 그들의 호소를 전하려 했으나 대통령은 나오지 않았다. 그 상황을 박후기는 이렇게 전한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성의 여왕은 말문마저 닫은 채
연대기적 패륜의 완성에 몰두했다
—박후기, 「우리들의 중세」(『실천문학』, 2014년 겨울호) 부분

박후기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성의있는 조사를 요구한 유민 아버지 김영오씨의 단식을 “딸을 잃고 말을 잃은/한 소녀의 아버지가 광장 구석에서/돌베게를 베고 미라가 되어갔다”고 전하며, 그의 단식을 외면한 박근혜의 시대를 “산 채로,/인간을 매장하던 시절이 있었다”라고 말한다. 시인은 과거형으로 전했지만 그 과거는 우리들이 사는 오늘과 정확히 겹쳐지고 있는 우리의 현재이다.
정끝별과 박후기가 송전탑 건설에 반대한 밀양의 할머니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유가족들의 광화문 농성을 통하여 역사의 퇴행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에겐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직접 내미는 따뜻한 손의 위로가 동시에 필요하다. 그 몫은 이영주가 맡아주고 있다. 이영주의 시, 어느 구석에서도 세월호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시 속의 광화문은 세월호 농성장의 다른 이름이다. 그 농성장에서 시인은 “대기는 친구들로 꽉 차 있네”라고 말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 죽은 아이들을 찾아온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지만 시인에겐 그들이 찾아왔으므로 죽은 아이들도 그 자리에 함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그곳에선 죽은 아이들과 산 아이들이 뒤섞여 있다. 시인이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붙어 있으면 서로 헷갈리잖아. 누가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시인에게 광화문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위로하러 가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캠핑 텐트”를 펼치고 그 안에서 “살아 있는 친구들”이 “방수포를 펼치고 누워 서로 얼싸안는” 곳이다. 그러면 그 순간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인다.

…(전략)이봐, 이렇게 가까이하면 너무 꽉 차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뒤바뀌잖아(후략)…
—이영주, 「광화문 산책」(『문학동네』, 2014년 겨울호) 부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 찾는 사람을 맞는 사람도 많아진다. 찾는 사람은 광화문을 채우지만 맞는 사람은 그 곳의 대기를 채운다. 맞은 사람은 영혼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대기가 알 수 없는 어린 친구들로 꽉” 찬다. 그때의 광화문은 세월호 농성장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을 호흡하는 곳이다. 항상 농성장을 돌아보는데 그쳤던 나는 시인과 함께 산책을 하며 비로소 아이들을 호흡했다.

3
겨울은 기온이 가장 낮게 가라앉는 계절이지만 남으로 창을 둔 집에선 햇볕이 가장 깊게 거실을 파고드는 계절이기도 하다. 여름내 집바깥을 서성거렸던 햇볕은 가을부터 조금씩 깊게 몸을 집안으로 들여놓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아예 집안 깊숙히 몸을 눕힌다. 이제 햇볕은 하루 종일 집안에서 서서히 몸을 뒤채며 거실을 뒹굴거리는 것으로 이 계절을 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만큼 빛과 가까이 지내는 계절도 드물다. 가끔 나는 그 햇볕 속에 몸을 맡기고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볕좋은 날에는 나의 낮잠을 오후 늦게까지 길게 덮어줄 정도로 따뜻했다.
나는 마치 햇볕과 놀듯 이 계절의 시들과 함께 놀았다. 시와 함께 뒹굴거리는 시간의 마지막 무렵쯤 이영주가 “지금은 밖보다 안이 더 추운 시간”이며 “지금은 바깥보다 안이 더 죽은 시간”이라고 했지만, 그가 “알 수 없는 어린 친구들로 꽉” 채워준 광화문의 대기는 내겐 햇볕이 잘든 우리의 거실이었다. 나는 시인들의 덕택에 이 겨울에 바깥을 햇볕이 잘든 거실처럼 거닐며 시의 세상을 함께 했다. 겨울인데도 따뜻한 세상이었다.
(『문예바다』, 2015년 봄호, 시 계간평)

2 thoughts on “흑백의 계절에 돌아본 시의 세상 – 『문예바다』, 2015년 봄호, 시 계간평

  1. 개별 시들보다 그 시들이 실린 지면들, 그러니까
    문동, 문바, 문사, 실문, 창비, 현시 등 다양한 계간지들의 존재가 반갑네요.

    1. 한해 동안 계간평을 연재하기로 했는데.. 동네에 은근 도서관이 많네요. 이틀 정도 걸어서 다섯 군데 정도를 돌고 있습니다. 다행이 보유 잡지들이 약간씩 달라요.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