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사소하며 낡고 누추한 것들로 빛나는 시의 세상 —계간 『문예바다』 2018년 가을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8년 가을호

1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 한 편이 있다. 롤랑 조페 감독의 <시티 오브 조이>이다. 1992년에 개봉되었다. 영화가 이끌고 가는 이야기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미국에서 온 의사 맥스와 인력거를 끌며 인도의 캘커타에서 살고 있는 하사리이다. 공간적 배경을 이루는 것은 캘커타의 빈민가 아난드 나가르이다. 가난하고 누추한 곳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곳은 <기쁨의 도시>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결혼식 장면이다. 결혼의 주인공은 하사리의 딸이다. 빈민가의 골목에 등이 내걸리고 결혼식은 바깥의 빈터에서 치러진다. 저녁 어둠이 밀려들고 등의 불빛이 결혼식을 환하게 밝히면서 영화는 마감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은 엔니오 모리꼬네의 <몬순>이다. 맑은 날이었지만 음악이 비처럼 마을을 적시고 있었던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난하고 누추한 곳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영화 속 부자들의 공간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최근에도 같은 경험이 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에서 비슷한 장면을 만났다. 영화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 어느 가족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하지만 이들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일반적 가족이 아니다. 어떤 연유로 함께 살면서 가족을 이룬 이들은 할머니의 연금과 좀도둑질로 살아간다. 내용만으로 보면 영화의 조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 속에선 혈연으로 이루어진 일반적 가족이 오히려 이기적이다. 아이가 실종되었는데도 찾지 않는 한 아동 학대 부부는 그런 가족의 대표적인 예이다.
영화는 중간에 스미다강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 소리에 처마 밑으로 얼굴을 내민 가족들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보여준다. 빛이 처마 밑으로 새어 나오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가족들의 모습이 나란히 잡힌다. 정작 불꽃은 하나도 보이질 않고 소리만 들린다. 누추한 공간이나 이들 가족의 공간이 환하게 빛난다.
누추한 것이 빛날 때가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빛을 감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현실에서 빛나는 것들은 대개 고급스럽고 비싼 것들이다. 예를 들어 고급스럽고 비싼 결혼 예복은 누구의 눈에나 욕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빛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빛나는 것은 그 옷을 입을 형편이 못 되는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 사는 한 가난한 인력거꾼의 딸이다. 그 딸이 가장 비싼 결혼 예복보다 더 빛나는 존재라는 사실은 그 딸의 아버지와 어머니 이외엔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 한 아이가 어느 날 거리에서 데려와 여동생이 된 아이에게는 도둑질을 시키기 싫다는 마음을 가질 때 그 아이 또한 살고 있는 누추한 삶에도 불구하고 빛을 발한다. 그러나 그 빛을 감지하기는 쉽지가 않다.
다행스럽게도 시 속에선 누추한 것들이 발하는 그러한 빛을 좀 더 자주 접할 수 있다. 시인들의 눈이 그러한 빛을 감지하는 능력이 남다른 탓이다. 2018년 계간지의 여름호를 읽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시인들이 감지해낸 작고 사소하며 낡고 누추한 것들이 발하는 빛에 주목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선 빛이 시 자체의 것이었다.

2
김나영의 시 「원정」으로 시작해 본다. 시는 민들레를 말하고 있다. 민들레는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다. 너무 흔하면 하찮은 꽃이 되기 쉽다. 민들레는 크기도 그렇게 크지 않다. 꽃대가 가늘어 연약하기도 하다. 물론 시인은 그 흔하고 하찮은 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시인의 민들레에 대한 관심이 처음부터 특별한 것은 아니다. 김나영이 처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민들레의 생긴 모습이다. 시인은 민들레를 가리켜 “톱니처럼 생긴 꽃”이라고 말한다. 민들레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구절이다. 그 민들레는 “맞물려서피어나고맞물려서피어난다.” 홀로 피는 법이 없이 여러 개의 꽃이 한꺼번에 핀다는 뜻이다. 약간의 관심이면 이 또한 수긍할 수 있는 구절이다. 시인은 또 이 꽃이 그냥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꽃을 길어 올린다”고 말한다. 땅에 낮게 붙어 있다 꽃대를 길게 빼는 민들레의 특징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좀 더 깊은 관심을 두고 관찰해야 알아차릴 수 있는 부분이다. 민들레에 대한 시인의 관심이 깊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 깊은 관심으로 바라보면 민들레는 “아무 곳 아무 데로 전투적으로 번 져 간 다 번 져 간 다.” 민들레의 왕성한 번식력을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 번식력에는 “대기에 미세먼지 하나 남기지 않”으며 “석유 한 방울 사용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앞과 뒤로 붙어 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민들레가 우리와 비교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세먼지를 만들어낸 산업화와 화석 연료의 사용은 그 주범이 우리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번식력은 사실 민들레보다 더 가공할 지경이다. 지구를 75억의 인구로 덮어버렸고, 민들레보다 사람이 더 자주 눈에 띈다.
시인은 이제 민들레가 “인조석과 활주로를 가볍게 넘”고 “총칼 없이 미사일 없이 드론 없이 국경과 바다를 건너” 날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날아간 민들레는 그곳의 점령자가 되는 법이 없다. 총칼과 미사일로 국경을 침탈하여 파괴를 일삼는 인간들과 달리 민들레는 미얀마의 박해로 사는 곳을 떠나야 했던 “방글라데시 로힝야족 난민들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발아를 기다”린다. 또 테러로 얼룩진 “시리아 홈스 주택가 주인 잃은 신발 안에도 뿌리를 내리고 상처 난 대지를 꽃으로 봉합한다.” 인간이 국경을 넘어 살상과 파괴를 일삼을 때 민들레는 죽음으로 내몰리고 박해받는 사람들이 잠깐이나마 누리는 평화가 된다. 시인은 민들레의 얘기를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저렇게 비폭력적인 이데올로기도 없다

민들레 씨앗 안에는 엎질러지기를 소망하는 초록물감이 수십억 톤

23.5° 기운 민들레 씨가 지구의 자전속도에 따라 지구촌 어디든 번 져 간 다 번 져 간 다
—김나영, 「원정」(『문예바다』, 2018년 여름호) 부분

김나영의 시 속에서 민들레는 그냥 꽃이 아니다. 그것은 평화를 전하기 위해 세상의 원정에 나선 꽃이다. 그 꽃은 세상의 곳곳으로 날아가 싸우거나 죽이지 말고 평화롭게 살라는 전언이 된다. 그리고 이쯤에 이르면 우리는 인간이 민들레보다 나은 것일까를 돌아보게 된다. 당연히 민들레는 우리보다 더 빛나는 꽃이 된다. 시인은 민들레가 전하는 평화의 빛을 보았을 것이며, 그 순간 그 빛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시의 세상에선 그렇게 우리들 인간보다 작고 하찮은 민들레가 더 빛난다.
민들레는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걸음을 구체적 장소로 옮겨보기로 한다. 바로 ‘영등포역’이다. 임지훈은 그의 시 속에서 영등포역에는 “시칠리아 관광포스터”가 붙어 있고, 그 포스터 속 “원형극장의 배경은 푸른 바다”라고 말한다. 또 “역에서 내려오면 편의점”이 있고, 편의점 앞에는 “테이블이 두 개 펼쳐져 있”으며, 테이블은 “따뜻한 걸레질로 깨끗하다”고 말한다. 크게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풍경이지만 이 풍경은 시인에 의해 연극의 무대로 뒤바뀐다.
나는 무엇이 영등포역의 주변을 한 편의 연극 무대로 바꿀 수 있게 해주었을까를 생각했다. 그냥 흔하게 우리들이 입에 올리는 말, 바로 삶은 한 편의 연극이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누구의 삶이나 극적 측면이 있다는 뜻으로 우리들은 그 말을 쓰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의 삶을 무대에 올려 정말 공연으로 삼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임지훈은 바로 그 일을 해낸다.
그렇게 하여 영등포역이 무대로 바뀌면 그곳의 노숙자들은 더 이상 노숙자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추레한 역을 맡은 배우들”이며, “분장은 물론 씻기를 거부하여 영혼을 숙성시키는 역한 냄새까지 견디는 깊은 내공”을 가진 자들이 된다. 노숙자들을 역에서 몰아내는 역의 직원은 ‘완장”이 되며, 때문에 “호루라기를 불며 연기자를 깨워 역사에서 몰아내고 있는 완장의 표정도 계산된 연기일 뿐”이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그냥 행인이 아니라 “영등포공원을 지나며 통유리를 흘깃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바쁜 엑스트라들”이 되며, 출근하는 회사원들로 짐작되는 이들은 “모두 단정하고 예쁜 입매의 꿈꽃들”이기도 하다. 심지어 이 무대는 무대 효과도 있다. 갑자기 내린 비가 불러온 그 무대 효과는 다음과 같다.

갑자기 배우들의 발길이 후다닥거리며 비가 내린다
형형색색 우산들과 비옷들이 이오니아해(海)가 되어 출렁거리고
좌회전 신호를 받은 자동차들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시칠리아의 원형극장 주위를
조심스런 표정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임지훈, 「영등포의 비는 왜 경(經)으로 내리는가」(『문예바다』, 2018년 여름호) 부분

말하자면 비가 내리면서 사람들이 펴든 우산과 비옷의 색이 ‘이오니아해(海)’를 표현한 무대 효과인 것이다. 시가 처음 시작될 때 시칠리아의 원형극장은 멀리 이탈리아까지 가야 만나볼 수 있는 곳이었지만 시가 마무리될 때 그 시칠리아의 원형극장은 영등포역으로 옮겨져 있다. 덕분에 우리가 영등포역의 주변을 걸을 때 한 편의 연극이 우리를 스쳐 간다. 그 연극 속에선 노숙자이든, 역무원이든, 아니 그냥 길거리를 걷는 출근길의 시민이든 누구나 그 무대의 중요한 출연자이다. 모든 것이 한 편의 연극으로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등포라는 구체적 장소로 갔던 걸음을 한 존재에게로 옮겨보기로 한다. 길상호가 안내한다. 시인은 그 존재의 삶을 “시장의 오체투지는 해가 저물고야 끝났”으며, “으슥한 골목, 고무판 아래 접어둔 다리를 꺼내 주무르며/통 속 수입을 헤아리는 그의 낯빛이 어둡다”고 전한다. 바퀴가 달린 판에 엎드려 시장통을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여 먹고 사는 사람을 말함이다. 하반신이 마비되어 걷지를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통 속 수입을 헤아리는 그의 낯빛이 어둡다”는 구절로 미루어 오늘 그의 수입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에겐 “바닥을 기는 것만이 이제껏 익혀온 생활의 기술”이다.
이러한 경우 우리들이 시인이 말한 그의 삶에서 읽어내는 것은 대개 삶의 힘겨움이나 고단함이다. 그러나 “가로등이 밝혀놓은 그의 손바닥”을 들여다본 길상호는 “타르초처럼 붉고 푸른 상처들만이 나부낀다”고 말한다. 타르초는 티벳이나 네팔, 히말라야와 같이 티벳 불교를 믿는 곳에서 볼 수 있는 다섯 가지 색의 펄럭이는 천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언덕이나 중요한 길목에 내 걸린다. 오색의 이 깃발에는 경전이 적혀 있다. 타르초가 있는 곳이면 티벳 사람들은 향을 올리거나 소망을 빈다. 시인에게 걸인의 손바닥에 난 상처들이 타르초로 보인 것은 “운명이라는 비탈을 넘어 다니기 위해” 그가 수“많은 기도문을 손금에 묶어둔”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손안에 희망을 쥔 사람이 된다. 타르초가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듯이 그가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고 나면 우리의 눈에 힘겹고 고단해 보이던 삶이 아직 길고 오랜 일정을 남겨둔 순례자의 삶으로 바뀐다.

이제는 하루 치 고행을 끝낸 두 다리를 위해
남루한 전생을 벗어놓고 가지런히 누울 시간,
통 속에 구겨진 영혼을 주워 담아 일어서는
그의 손에는 아직도 먼 순례의 지도가 남아 있다
—길상호, 「손바닥 성지」(『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부분

우리는 그럭저럭 살고 있고, 바닥에 엎드려 길을 기어가며 구걸을 하는 걸인은 고단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그 걸인의 손에서 바람 속에 걸어놓은 오색의 깃발을 보는 순간, 손바닥으로 밀고 가는 그의 삶은 성지를 가는 순례의 길이 된다. 고단에 막혀 있던 삶이 순례의 길로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 존재에 맞추었던 시선을 이번에는 사진이라는 대상으로 옮겨본다. 이 사진은 인화지 사진이다. 말하자면 뒷면을 가진 사진이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사진은 큰 변화를 겪었다. 카메라로 찍고 필름을 현상한 뒤 인화하여 사진을 이용하던 시대는 이제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찍고 나면 그 자리에서 확인이 된다. 인화의 과정 없이 사진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인화지 사진과 달리 이제 사진은 뒷면을 갖지 않는다. 사진을 컴퓨터나 태블릿 PC, 혹은 핸드폰의 화면으로 보기 때문에 사진의 뒤는 컴퓨터 모니터나 태블릿 PC, 핸드폰의 뒤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디지털 시대는 사진의 뒷면을 잃어버린 시대이다. 하지만 뒷면의 상실이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 인화지 사진의 뒷면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뒷면은 텅 비어 있었다. 그곳은 상실할 여지가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김려원에게선 그렇지 않다.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사진의 뒷면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곳이 아니다.

너는 왼쪽을 찍었고
나는 오른쪽을 찍혔다

그것을 모르는 척하기 위해
흰 벽면을 숨겨 두고 우리는 앞쪽의 즐거운 컬러들
그렇다면 찰칵, 이라는 소리는
또 얼마나 얇은 부피인가

그리운 찰칵
먼 부피
—김려원, 「사진의 뒷면」(『문예바다』, 2018년 여름호) 부분

찰칵은 사진이 찍히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그립다고 했으니 시인이 들여다보고 있는 사진은 그리움이 되었을 정도로 오래된 사진이다. “먼 부피”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카메라로 찍어서 인화하는 것으로 사진은 탄생된다. 그 사진의 두께는 얇다. “찰칵, 이라는 소리는/또 얼마나 얇은 부피인가”라는 시인의 말은 셔터음과 함께 찍혀서 인화된 사진의 두께를 염두에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진에는 시간이 축적된다. “먼 부피”는 바로 그 사진에 축적된 시간의 두께일 것이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도 역시 시인이 들여다보고 있는 사진은 오래전의 인화지 사진이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이 들여다보고 있는 사진에서 찍는 자와 찍히는 자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시의 첫 구절을 삼는다. 찍는 사람이 왼쪽을 찍으면 그것이 나에겐 오른쪽이다. 사진을 찍고 찍힐 때의 우리는 좌우로 어긋난 관계일 수 있다. 김려원은 우리가 그렇게 어긋나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척” 숨기고 “앞쪽의 즐거운 컬러들”이 된다고 말한다. 사진 속에 담긴 사람들의 사이가 좋든 말든 사진에서 “매 순간의 주인공은/치즈나 김치를 먹은 스타일”로 입에 미소를 머금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진은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우리들의 관계마저도 인화를 한다. 숨겨놓은 관계는 바로 사진의 뒷면에 인화되어 있다. 김려원은 이 때문에 사진의 뒷면을 “흰 벽면”이라고 말한다. 폴라로이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진 뒷면은 흰색이다. 우리는 비어 있다고 생각하나 시인에게 그 빈공간은 사진 속에서 “물방울 번진 표정으로 기대어 한 컬러인 우리들”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이 인화된 결과이다. 사진 앞쪽에 즐거운 표정으로 인화되어 있는 우리들 사이에서 벽은 보이질 않으나 뒷면에는 우리들 사이에 놓여있던 벽이 또렷이 하얗게 인화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사진의 뒷면에서 여전한 “흰 벽”을 감지해 내는 것이 놀라운 시인의 감각이다.
사진에 기울였던 관심을 이번에는 새소리로 옮겨본다. 아마도 마경덕은 아침마다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새소리가 들리는 집에서 살고 있나 보다. 시인은 섬세하게 들으면 새소리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새소리에서 새소리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소리도 된다.
먼저 시인은 “귀에 닿기도 전/절반은 바람에 날아가 버린/작은 새소리가 창틈으로 스민다”고 했다. 고백하자면 내가 사는 집에서도 이른 아침마다 새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내게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뒤섞여 둘이 동시에 들릴 뿐이다. 이런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시인이란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뒤섞여 들릴 때 그 새소리가 바람에 의해 절반이 날아간 소리란 점을 구별해내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감각을 갖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놀라운 점은 시인이 그렇게 구별을 해내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의 귀에도 새의 노랫소리가 구별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멀리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마침 창가로 불어온 바람을 타고 날아와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람이 부는 날, 멀리서 매미 소리가 들리던 그동안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이러한 섬세한 감각으로 보면 “작은 새소리”는 이제 새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허공의 말이 된다. 시인이 “허공의 은밀한 말이/빨랫줄에서 살구나무로 번지고 있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실제로는 새가 빨랫줄에 앉았다가 살구나무로 자리를 옮겼을 것이다. 시인의 감각은 여전히 섬세하여 심지어 이 “허공의 은밀한 말”을 양으로 짚어내기까지 한다. 그 양은 다음과 같다.

간장 종지나
꼬막껍데기 한쪽에 담기 좋은
딱 그만한
한 꼬집의 말
—마경덕, 「아침의 뼈」(『문예바다』, 2018년 여름호) 부분

이 구절을 읽던 나는 잠시 허공으로 눈길을 둔 뒤 엄지와 집게를 허공으로 뻗어 허공을 “한 꼬집” 집어낼 뻔 했다. 그러면 “허공의 은밀한 말,” 그러니까 “작은 새소리”가 손끝에 집힐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때로 시는 우리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손을 내밀어 말을 집어내려 하게 만든다.
시인이 “마요네즈 케첩 칠리소스도 뿌리지 않은/맹물 같은//이 맑은 소리,” 말하자면 어떤 양념도 첨가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소리라고 한 작은 새소리는 누구나 들을 수 있으면서도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없는 소리이기도 하다. 새소리에서 “허공의 실핏줄 같은 미세한 소리”를 감지해 내는 것은 내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시인은 “세상의 약속도 버려두고/변기에 멍하니 앉아 있”으면 들을 수 있는 듯이 말한다. 나는 이 부분에선 시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새소리를 섬세하게 듣고 있을 때 시인의 자세가 그러했을 뿐, 그런 자세를 취한다고 새소리가 섬세하게 들리진 않는다.
시는 “허공의 실핏줄 같은 미세한 소리가 아침의 뼈를 맞추고 있다”는 구절로 마무리되고 있다. “아침의 뼈”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대개 아침은 잠을 자고 난 다음인데도 쉽게 일어날 수 없을 때가 많다. 피곤이 한 밤의 잠으로 쉽게 씻기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런 아침에 새가 깨운 덕택에 무릎에서 피곤을 걷어내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존 배낭이란 것이 있다. 재난에 대비한 비상용품이라고 할 수 있다. 생존 배낭은 비상식량과 각종 생활용품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시인의 생존 배낭을 채우고 있는 것은 이와는 많이 다르다. 이원이 시인의 생존 배낭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시인은 우선 “배낭 오른쪽 포켓에/비둘기의 빨간 발 다섯”을 넣겠다고 했다.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무엇에 쓰려고 그런 것을 생존 배낭에 넣는 것일까. 의문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시인은 괄호로 묶어 “(용도는 모를 것)”이라고 부연 설명을 붙여놓았다. 하지만 이 설명은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이 구절을 그 답으로 삼아보면 시인이란 실용적 용도로 생존하는 존재가 아니다. 실용적 용도로 생존을 추구하는 자리에는 시가 자리하지 못한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니 “용도는 모를 것”이라는 말은 시인이 생존 배낭에 넣는 것에 대해 실용적 용도를 묻지 말라는 부탁이 될 수도 있다. 그밖에도 시인의 생존 배낭을 채우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다. 시의 가운데 부분에서 몇 가지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배낭 안에는
어깨를 덮어줄 언제나 더 진한
초경량 어둠(맨 아래에 있어 거의 꺼내기 어렵다)
그림자에 부을 때만 금빛으로 끓어오르는 한 움큼 모래주머니
(다져진 칼날이거나 귀가 깨진 바늘이거나
‘비로소 마주 봄’이거나)
손바닥 크기 노트
(필기구를 잊어버렸다)
20센티미터 나무 자
(재보고 싶을 때가 있을 거야. 잴 수 없는 것에 대고)
—이원, 「생존 배낭」(『문학과사회』, 2018년 여름호) 부분

사실 나는 이들 구절을 읽으며 이 또한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답으로 삼았다. 그 답에 의하면 시인이란 가벼운 어둠으로 어깨를 덮고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며, 그림자에 부으면 금빛으로 끓어오르는 한 움큼의 모래를 갖고 싶은 사람이다. 또 날이 무뎌진 칼날이나 귀가 깨진 바늘처럼 용도를 상실한 것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손바닥 크기의 노트는 챙기면서 필기구는 잊어버리는 약간 덜떨어진 사람이다. 20센티미터 나무 자를 챙기면서 그것으로 잴 수 없는 것을 재보겠다는 꿈을 갖는 사람이기도 하다. 모두가 시인의 생존에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나 실질적 생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다고 생존과 관련된 것을 전혀 갖추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시의 마지막 구절은 시인의 생존을 위한 부탁처럼 보인다. 그 부탁은 “기다리세요. 다가오지 마세요. 그리고 멀어지지 마세요”라고 되어 있으며, 시인은 다시 괄호로 묶어 그 부탁에 “(최후의 카드. 구원 요청)”이라고 부연해 놓았다. 시인은 시로 생존하며 시인의 생존이 위험해 처했을 때는 사회가 시인을 구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문보영의 시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상황은 누구나 겪어 보았음직 한 아주 흔한 상황이다.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다리를 꼬고 앉은 상황이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다리를 꼬고 앉으면 그 옆의 사람은 불편하다. 불편하면 화가 난다. 욕도 나온다. 그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문보영에게선 바로 이러한 너무 일상적이어서 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듯한 상황이 시가 된다. 일부를 읽어보자.

A가 지하철을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간다. 옆에 어떤 남자가 앉는다. A는 상체를 살짝 앞으로 빼고 무질을 읽고 있다.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는다. 그의 오른쪽 발이 A를 향한다. 구두코가 무질의 머리와 A의 무릎을 번갈아 위협했으므로 A는 독서에 집중하기 어렵다. A가 읽고 있던 무질의 문장은 “그는 서른두 살이었고, 그 나이에는 적대감이나 사랑을 파악하는 것에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이다. 그 문장에 A는 밑줄을 긋고 있다. 그때, 남자의 팔꿈치가 A의 팔을 치는 바람에 문장의 선이 틀어진다. A는 얼굴을 들어 건너편 유리를 본다. 창에 비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귀를 파고 있다. 귀를 파는 바람에 팔을 접었으며 그래서 팔꿈치가 A를 친 것이다. 그가 팔꿈치로 A를 쳤기 때문에 A가 긋던 문장에 굴곡이 생겼고 A는 문득, 우리는 방금 어떤 종류의 대화를 한 셈인데, 인간들의 대화라는 게 다 이딴 식으로 생겨먹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A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는 결국, 귀를 파는 사람의 접힌 팔꿈치가 나의 팔을 쳐, 긋고 있던 문장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남자가 전동차에서 내린다. 남자가 멀어진다. A는 멀어지는 인간의 두서없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가까이서 보면 희극, 멀리서 보면 비극, 이라는 문장을 A는 떠올린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이라는 문장으로 문장이 수정되지 않는다. 대신, A는, 사라지는 거품을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대칭이지만 확대하면 난장판인. A는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의 난장판을 눈으로 좇는다. 비극이 더 무질서하고 복잡한가. 희극이 더 무질서하고 복잡한가. A는 사람과 의견 교환 같은 건 안 하고 싶다. 인간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봐도 희극이므로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차이가 없다, 라는 문장은 무질에게 없다. 이제, 남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문보영, 「인간들이 대화를 한다」(『문학동네』, 2018년 여름호) 부분

지하철에서 다리를 꼬고 앉거나 부주의한 움직임으로 옆 사람을 치는 행위는 무례한 행위이다. 무례한 행위를 하고 사과도 하지 않으면 더 무례하다. 무례는 분노를 부른다. 그런 일이 지하철 속에선 자주 벌어진다. 아마 시속의 ‘A’였을 문보영도 그런 일을 겪었을 것이며 신경질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문보영은 그 순간을 시로 구상해낸다. 그러자 무례한 자리에서 무례를 보기 좋게 누르고 시가 빛났다.

3
작고 흔한 것이 빛날 수 있을까. 시 속에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시의 나라에서 작고 흔한 민들레가 평화의 원정길에 나서 빛나고 있는 세상을 만난다. 영등포역 앞의 평범한 일상적 풍경은 한 편의 연극으로 빛나며 우리 앞을 지나간다. 길바닥에 엎드려 배를 밀고 다니며 구걸을 하는 걸인의 손바닥에선 순례의 삶이 빛난다. 사진의 뒷면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웃음을 지으며 마무리하는 사진 속 우리들 사이의 벽을 인화한다. 아침에 듣는 작은 새소리는 피로를 털어내고 아침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힘으로 빛난다. 시인의 생존 배낭을 열면 생존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가벼운 어둠이나 “만난 적 없는 스무 살 엄마”와 같은 것들이 가득하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생존도 큰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시의 세상에선 지하철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옆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무례의 자리에서 그 무례를 누르고 시가 빛난다. 내가 2018년 계간지의 여름호에서 마주했던 시의 세상이었다.
(『문예바다』, 2018년 가을호, 계간평)

2 thoughts on “작고 사소하며 낡고 누추한 것들로 빛나는 시의 세상 —계간 『문예바다』 2018년 가을호 시 계간평

  1. 오랜만에 찾아 왔습니다.

    몇 번 들렀는데 글이 변하지 않아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이 되었는데
    별일 없이 잘 지내고 계시는군요.

    앞으로도 좋은 사진, 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