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색 꺼내기, 눈감고 소리 보기 – 김점용의 신작시 다섯 편

Photo by Kim Dong Won
시인 김점용
(2006년 5월 22일)

1. 김점용은 그의 첫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에서 ‘심연’ 을 가리켜 “수만 가지의 색깔을 품은/바닥 없는 검은 우물”이라고 했다. 심연은 매우 깊다. 아무리 물이 맑고 투명하다고 해도 빛이 파고들 수 있는 바다의 깊이는 그다지 깊지 않다. 물이 흐리면 빛이 파고들 수 있는 깊이는 더 얕아진다. 빛은 수면을 핥으며 반짝거리다 스러질 뿐 바다 속 깊은 곳, 심연의 바닥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때문에 심연은 어둡고 검다. 그 심연을 “바닥 없는 검은 우물”이라고 한데 대해선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김점용은 우리들이 잠시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운 강렬한 태양빛도 전혀 그 촉수를 뻗지 못하는 검은 어둠의 심연을 가리켜 그곳에 “수만 가지의 색깔”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얘기를 시집을 시작하는 자리에 서시로 내세워 마치 그의 시세계에 대한 이정표처럼 걸어두고 있다. 그렇다면 어둠밖에 보이지는 않는 심연이 그 속에 수만 가지 색깔을 품고 있다는 그의 얘기는 과연 무슨 뜻일까.
가령 누군가를 둘러싼 가족 관계의 구성에 “배다른 형”과 “씨 다른 누나”(<괄호 안을 더듬거리다>)가 포함되어 있고, ‘어머니’는 또 “아버지의 세번째 아내”(<소가 어머니를 죽이다>)였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런 가족 관계 속에서 자라는 아이의 유년기 경험은 어둡게 채색이 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많은 경우 그 유년기의 삶은 헤어날 수 없는 심연같았을 것이다. 또 아이는 자신의 그 경험을 아무도 엿볼 수 없도록 심연의 어둠 속에 꽁꽁 묻어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어둠 속에 묻어둘 때 스스로의 삶도 그 어둠 속에 유폐된다.
그의 첫시집엔 자폐증을 가진 한 아이가 자주 등장한다. 바로 자폐아 우인이이다. 그 아이도 심연의 어둠이 어떤 것인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그것을 장애로 재단하는 순간, 장애아를 아이로 둔 부모의 가슴은 막막해진다. 아이가 장애아로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어둡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들도 심연의 어둠 속으로 깊이 가라앉고 만다.
김점용에게 기대면 시란 바로 그 심연 속으로 깊이 잠입하여 그 어둠을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이다. 놀라운 것은 시인이 그 어둠을 노래로 엮어내 시로 풀어 내면 어둠이 어둠이 아니라 드디어 삶이고 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김점용이 말한 “수만 가지의 색깔”이란 알고 보면 수만 가지 삶의 얘기에 다름아닐 것이다. 그것도 심연의 어둠 속에 숨겨두고 가두어둔 가슴아픈 얘기들이다. ‘남창’이 되어 “정념 많은 여자들의 몸 속 어둠을/환하게 풀었으면”(<외팔이 여자 인형>) 하는 그의 꿈도 알고보면 그런 심연의 어둠에서 삶의 이야기를 건져 내고 싶다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삶의 심연은 사실 그것이 어두울수록 그 삶이 간직한 얘기는 더 많아진다. 김점용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삶이 어두울수록 더 많은 색깔을 품는다. 그 어둠 속에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어둠 속의 삶을 시로 건져내면 그 삶이 스스로 빛을 내며 길을 열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하여 이야기로 풀려난 어둠은 스스로의 빛과 색을 갖는데 그치지 않고 세상의 구획을 재편하는 힘을 갖추기 시작한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이 “생의 전쟁터”가 되고 자폐아 우인이가 오히려 우리들에게 있어 이 전쟁터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는 <내 마음의 망명 정부>가 된다. 아마도 시인의 꿈은 사람들을 자신이 재편한 그 시 속의 세상으로 끌어들여 정상과 비정상으로 완고하게 선을 그어 사람들을 비정상의 세계에 가두고 차별해온 세상에 대해 반성의 기회를 만들고, 두 세계가 함께 사는 화해의 지형도를 제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2. 이번에 김점용이 내놓은 다섯 편의 신작시 속에선 그 어둠 속의 색 꺼내기라는 시인의 꿈이 다른 형태로 변주되고 있다.
시인이 첫시집에서 보여준 생각, 즉 심연의 어둠 속에 수만 가지 색이 있다는 생각은 이번 신작시 중의 <관음증>에선 눈을 감으면 세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있다. 여기서 그의 관음증은 누군가의 벗은 몸을 몰래보려는 관음증이 아니라 소리를 듣는 차원을 넘어서 눈의 영역으로 확대하는 시인 특유의 증상을 가리킨다.
그는 말한다. “소리를 본 적이 있”다고. 그가 소리를 보았다고 한 곳은 “계곡”이다. 자연히 사람들은 그가 눈을 감고 계곡을 흘러가는 물소리에 취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눈을 감은 것은 그가 아니다.

작은 계곡에 가만히 앉아
바위의 눈을 감기고 시냇물의 눈을 감겼습니다
그때 산새가 울자
머리 두어 길 위에
산새 울음이 검은 보자기처럼 둥글게 떠올랐습니다

울음은 넓게 퍼졌다가
수제비처럼 한 장씩 잘게 뜯어져
계곡 물소리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갔습니다

물론 실제로 눈을 감은 것은 시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눈을 감았으면서도 그게 아니라 “바위의 눈을 감기고 시냇물의 눈을 감겼”다고 말한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은 까맣게 덮여진다. 즉 눈을 감고 뜨는 내 행위에 의해 자의적으로 세상이 덮여지고 다시 펼쳐진다. 시인은 그 자의 앞에선 세상이 저만치서 그냥 멀뚱히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선 눈을 감고 소리를 들을 뿐, 소리를 보기는 어렵다. 소리를 보려면 세상의 동참을 구해야 하고, 세상 속으로 잠입해야 한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바위의 눈을 감기고 시냇물의 눈을 감”기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단순히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동참을 얻어내고 세상으로 잠입한다. 왜냐하면 이제 세상도 함께 눈을 감은 것이므로.
그 동참과 잠입의 힘은 놀랍다. 눈을 감았기 때문에 머리 위에서 들린 산새의 울음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린다는 차원을 넘어 그 울음소리가 눈을 감았을 때의 어둠으로 모두 전이되면서 어둠이 “검은 보자기처럼 둥글게 떠”올라 계곡의 아래로 흘러가는 동적 움직임을 얻기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산새의 울음소리가 어둠에 움직임을 불어넣고 있다. 시인이 보았다는 ‘소리’는 그러므로 눈을 감고 선명하게 듣게 된 산새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사실은 움직이는 그 어둠이다. 움직이고 있었으니 더더욱 분명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김점용은 눈을 감고 소리를 보기에 이른다.
그러한 동적 느낌은 <사무치다>에선 더욱 강화되어 시인의 온몸으로 전이되면서 “눈을 감으면/귀 하나가 한없이 커져/어느 깊은 산속 떡갈나무 이파리의 여린 숨소리를 듣”기에 이른다. 이를 사람들의 일반적 감각 속에서 정리를 하면 산속에 가서 눈을 감았을 때 바람에 사각대는 떡갈나무 잎사귀의 소리가 귀에 더욱 확연하게 들려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눈을 감고 소리를 듣는데 그치지 않고 귀를 한없이 키운다. 귀를 키운다는 것은 바람소리의 너머로 넘어가 보라는 권고일 것이다. 그렇게 귀를 키우자 바람이 떡갈나무를 흔들 때 나는 소리의 너머로 건너가 떡갈나무 이파리의 “여린 숨소리”에 이르게 된다. 김점용은 그것을 가리켜 떡갈나무와 하나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눈을 감으면
어느새 몸이 투명해지고
투명해진 몸이 커지고 커져
세상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네

몸이 투명해졌다는 것을 보면 시인이 자기 색을 버린 것이 분명하다. 투명은 색이 없다. 바람이 그렇다. 그러나 바람이 색이 없다고 그 존재가 지워지는 법은 없다. 시인은 눈을 감을 때 자기 색을 지우며 투명이 되고, 그것을 통하여 “세상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는 법을 터득한다. 결국 시인이 말하는 “내 안에 든 모든 것이/사무치고/또 사무치”면서 향하고자 하는 곳은 자신의 색을 버리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세상과 하나되는 차원의 세계인 셈이다.
김점용의 또다른 시로 눈을 돌려보면 그는 이제 자신이 눈을 감는 대신 <흰 달빛 아래> 서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태양이 눈을 감은 시간에 뜨는 것이 달이다. 그러니 그 시간은 세상이 송두리째 눈을 감은 시간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눈을 감는데 그치지 않고 이제는 세상 전체의 눈을 감기고 그 자리에 선다. 그 시간에 달빛 아래 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달밤
내 몸이 수천 갈래로 찢어져
흰 들판에 누워 있네

수천 개의 저울 위에
흰 달빛을 받고 아득히 누워 있네

커다란 솥에서
푹 삶아 늘어놓은 듯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팔뚝”과 “머리털,” “간 한 덩이,” “혓바닥” 등등이 여기저기 저울 위에 올라 세상에 흩어져 있는 광경을 본다. 정작 세상에 누워있는 것은 달빛인데 그는 자신이 산산히 흩어져 세상에 누워있다고 생각한다. 이 광경을 일반적 감각으로 정리하자면 커다란 가마솥에서 들끓는 듯 했던 세상사를 모두 잊어버리고 그저 달빛이 비추는 세상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순간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아마도 빛이 은은한 달밤에 서면 누구나 그런 경험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 순간 사람들은 누구나 한낮의 분주했던 자신을 놓아버리고 달빛에 자신을 실은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점용에게 있어 그 순간은 사람들이 한낮내내 움켜쥐고 있던 자신을 풀어놓으며 자신을 달밤에 내 맡기는 순간이다. 그건 첫시집에서 그가 자폐아 우인이에게서 보았던 망명지대와 유사한 것이다. 그러니까 달밤에 서면 우리는 때로 “흰 달빛” 아래로 망명한다. 태양빛이 눈을 감으면 그러한 망명이 가능해진다.
망명이란 어찌보면 이곳을 버리는 것 같지만 김점용의 시에서 망명이란 이곳을 버린다기 보다 그곳의 재발견이다. 자폐아 우인이의 가치를 발견하고, 환한 대낮이 아니라 달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이, 그의 시가 보여주는 망명의 본뜻이다. 그래서 그의 망명지대는 사실은 우리의 곁에 있다. 눈을 감는 것으로 그곳에 갈 수 있다거나 달밤에 바깥으로 나서는 것으로 그곳에 갈 수 있다면 그 망명지대는 곧 우리의 곁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우리들 곁에 있으면서도 우리와 유리되어 있었을 뿐이다. 김점용은 그 간격을 좁히려고 한다.
이번에 그가 선보이는 다섯 편의 신작시 가운데서 갑자기 그가 신기가 들린 것은 아닐까 의심이 가게 만드는 <즐거운 장난>도 나는 그런 맥락에서 읽었다.

친구가 몸이 자꾸 아프다고 해서 잠깐 봐준 적이 있다. 그의 어깨 위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선비가 서 있었다. 친구에게 그 선비와 빨리 화해하라고 진심으로 충고했다. 친구는 철학관에서도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나도 내가 무서웠다

사실 이는 우리들이 많이 듣고 접하는 얘기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람들마다 자신을 짓누르는 불화의 경험이나 기억이 하나둘쯤 없을까 싶다. 이 얘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귀신 얘기가 되어 버리지만, 그 귀신 이야기를 불화의 비유로 받아들이면 이 얘기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겪고 있는 불화의 기억에 대한 일반화가 된다. 그런 불화를 건너편에 세워두면 그것은 평생 동안 덜어내지 못하는 짐이 된다. 그는 그러느니 차라리 그 불화와 화해하라고 말한다. 불화와 화해하려면 그 불화의 기억을 건너편에 두고 바라보지 말고, 마치 눈을 감고 소리를 볼 때 세상으로 잠입했듯이 그 불화의 기억 속으로 잠입해 들어가 그곳에서 그 불화의 기억과 놀아야 한다. 그에겐 그것이 <즐거운 장난>이다.
<즐거운 장난>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우리를 짓누르는 불화에 주목하고 있다면 <사라진 엔젤다방의 벤자민>은 있다가 사라진 것에 주목하고 있다. 시에서 그가 서 있는 곳은 “통영 엔젤 터미널 앞”이다. 그 자리엔 원래 “엔젤다방”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일식집”이 들어서 있다. 그 자리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그 일식집은 일식집이 아니라 없어진 엔젤다방의 죽은 모습이다.

남망산 끝에서 몰려오는 소낙비
비를 피해 들어선 곳에
엔젤다방이 먼저 피하고 없다
디제이도 엘피판도 비틀즈도 노을도 없다
대신 들어선 일식집
죽은 것들은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말을 건다
개업 때 들어온 킹 벤자민이
분홍 리본을 매단 채 죽어간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하며, 그러면서 우리들의 수많은 기억이 담긴 것들이 사라져간다. 그리고 그 자리엔 새로운 것들이 자리를 한다. 보이는 것들의 색을 버리고 눈을 감은 뒤 투명이 되려 했던 시인은 이번에는 눈앞에 자리한 새로운 것에 적응을 못하고 그 자리에 있었던 옛기억을 붙잡고 있다. 하지만 시인이 갖고 있는 그 자리의 기억이란 그냥 단순한 옛추억이 아니다.
실제로 오늘을 만드는 것은 오늘의 새로움이 아니라 축적된 옛기억이다. 그렇게 보면 오늘이란 축적된 어제이다. 축적된 어제로서의 오늘은 우리들과 매우 친숙하다. 또 어제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선 항상 어제의 얘기가 솟아난다. 새것이 들어서면 그 어제가 송두리째 뿌리뽑혀 나가는 느낌이 든다. 어제가 송두리째 뽑혀나가고 새것이 들어선 자리에선 약속 장소에 나온 친구가 “딴 사람 같”을 정도로 어제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다. 김점용은 그리하여 세월에 밀려 없어진 것들의 자리에서 한참 동안 그 옛것에 대한 생각으로 그 자리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3. 실제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어렵다. 그것은 우리가 장애를 갖고 있거나 없거나에 상관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겐 예외없이 위로가 필요하다. 나는 가끔 맛보는 망명보다 더 큰 위로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김점용은 이번의 신작시 다섯 편에선 우리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가지 못하고 있던 망명지대로의 소통로를 마련한다.
누구에게나 계곡을 찾을 수 있는 하루쯤의 여유는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계곡의 물에 발을 담갔다 오는 여유도 좋지만 이번엔 그곳의 적당한 바위에 앉아 한번 눈을 감고 소리를 살펴보시라. 또 색을 버리고 스스로가 투명이 되어 떡갈나무의 숨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시라. 어디 한적한 산장에 머물 여유까지 주어진다면 시간을 잘 택하여 달밤에 흰 달빛에 자신을 실어 세상 곳곳에 흩뿌려 보시라. 그러고 나면 우리들 삶의 불화 속에서도 즐겁게 장난칠 수 있는 신기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새것이 밀려와 옛것을 정신없이 밀어내며 우리들의 어제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세상에서도 옛것의 자리에 대한 시선으로 어제를 붙잡아두면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상실감을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이번 주엔 어딘가 물소리가 좋은 계곡을 하나 골라 여행을 떠나야 겠다. 나도 요즘 사는 게 무척 힘들다.
(『미네르바』, 200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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