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음식 이야기
풋고추, 수박, 포도, 이면수. 시장에서 사오려고 마음먹은 것들 중의 일부이다. 조성희의 「어떤 하루」(『현대시학』, 2001년 5월호)를 따라가다, 그녀가 “시장에 다녀오던 날” 적어갖고 나갔다는 종이 쪽지 속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었다. 고사리, 참깨, 더덕, 쪽파, 마늘. 강인한이 안내한 「창평 국밥집」(『현대시』, 2001년 5월호)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그 국밥집이 위치한 “장터 마당에”서 “중국산 명찰을 달고” 놓여있는 그것들을 보았다.
모두가 음식의 재료들이다. 반찬거리라는 말로 한데 묶어도 좋을 것이다. 그것들은 시장의 한귀퉁이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는 어느 시골녘의 밭자락이거나 혹은 한시도 끊임없이 몸을 뒤채던 바다였을 것이다. 그것들은 어느날 그곳을 떠나 시장의 좌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장보러 나온 사람들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것을 장바구니에 담아가지고 돌아온 사람들의 손에서 그것은 그리하여 요리가 된다. 소금에 절여지고, 고추가루와 생강, 마늘, 젓갈에 버무려져 하나의 반찬으로, 음식으로, 요리로 밥상 위에 오른다. 완성도로 보면 요리란 말을 반찬이나 음식의 윗자리에 올려놓아야 마땅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 말들을 모두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 반찬은 음식인 셈이며, 음식은 요리인 셈이다.
나는 그것들이 요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처음부터 거의 순차적으로, 즉 그것들이 원래있던 있었던 곳이 자연이었음을 두번째로 상기시킨 것을 제외하면 시장을 거쳐, 부엌으로, 그리고 드디어는 우리의 밥상에 요리로 오른 순간까지, 그 흐름을 차례차례 그대로 따라가며 얘기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 그 동안 내가 요리에 대해 가졌던 일반적인 경험을 크게 왜곡시킨 것이다. 나는 항상 그 흐름이 끝나는 마지막 자리에서, 그러니까 그 흐름의 순차적 방향에서 보면, 정반대의 방향에서 요리 앞에 서 있었다. 항상 그 흐름과 함께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아내였다. 음식은 아내 담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를 집안일은 여자, 남자는 직장으로 선을 갈라, 그 선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가부장적 남자의 전형으로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집안일을 사이에 놓고 보면 우리 둘의 관계에서 나는 빨래 담당이었다(내가 빨래를 선택한 것은 언젠가 세탁기가 생기면 내가 크게 유리할 수 있다는 예리한 판단 때문이었다. 나의 판단은 적중했다).
그러한 관계는 가끔 아내와의 사이에서 큰 목소리로 불거지곤 했다. “너, 내가 빨래 안해줘서 홀딱 벗고 다닌 적 있냐? 난, 네가 밥 안해줘서 굶은 적 있어!” 나는 항상 아내를 그렇게 쏘아붙였다.
사실 나에게 있어 음식을 해주고 안해주고 보다 더 큰 불만은 그것의 맛이었다. 나는 음식은 어디까지나 맛이라고 보았다. 음식을 맛으로 판단하는 시각은 그것이 그 자리에 있기까지의 과정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맛으로서의 음식을 앞에 두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미각의 충족이란 잣대에서 한발자국의 양보도 없다. 그런 점에서 그 시각은 정체적이고 단순한 시각이다.
그러나 아내는 아니었다. 아내는 음식이 하나의 음식으로 밥상 위에 오를 때까지, 그 흐름과 동행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아내 사랑이 끔찍하다는 요즘의 젊은 녀석들처럼 아내와 함께 시장을 보고, 또 같이 음식을 조리하고, 그랬다면, 처음부터 음식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흐름의 동반자는 항상 아내였으며, 나는 아내가 함께 하며 이끌고온 그 흐름이 끝난 자리에서, 그러니까 아내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 음식 앞에 섰다. 그러한 방향의 충돌은 우리 둘 사이에 음식을 둘러싼 갈등을 양산하고 있었다. 아내는 말한다. 해준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맛있게 먹어줄 수 없겠느냐고. 아내의 그 말 속엔 음식을 맛으로만 재단하려 드는 내 태도에 대한 불만이 가득 배어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바로 음식이 있기까지의 흐름에 동행한 자가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음식에 대한 일반적 시각이었다. 그것은 음식을 맛으로 재단하는 정반대 방향의 내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리고 충돌은 곧 갈등이었다.
이 갈등 구조는 어떻게 해야 해소되는 것일까? 어느날 나는 문득 음식이 빚어내는 그 갈등의 비밀이 궁금했다. 우선 나는 그 비밀을 캐는 첫걸음으로 음식의 맛 너머로 시선을 돌려 그것이 내 앞에 놓이기까지의 연원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맛의 너머로 발걸음을 약간 더 옮겨보자, 부엌에서 조리를 하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나는 계속 시간을 거꾸로 돌려 그 전에 아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본다. 아내는 시장에 있다. 더 시간을 뒤로 돌려보자 아내가 장바구니에 담아갔고 왔던 것들의 원래 자리가 어느 시골의 밭자락과 바다였음이 드러난다.
밥상 위에 아내가 올려준 그 음식이 그 자리에 있기까지의 흐름을 역방향으로 더듬어간 끝에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음식이 단순한 전달의 과정이 아니라 소화의 과정이란 것이었다. 아내의 손에서 음식으로 만들어지기 전, 그러니까 밭에서 시장까지는 거의 전달에 불과하다. 모양이 크게 변치 않은 채 그것은 단순히 자리를 옮긴다. 하지만 시장에서 아내에게 전달되어 부엌의 조리대에 오른 순간, 그 질료들은 그 동안과는 현저히 다른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사실상 나는 음식만으로는 그것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유명 음식점의 비결이 그들만의 비밀로 유지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내는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조리법에 따라 음식의 재료들을 소화하며, 그 소화력이 객관적인 맛의 수준을 결정짓는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그 소화의 과정, 즉 음식을 만드는 과정은 상업적 거래를 목적으로 한 상품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녀는 자신이 음식을 만들 때 사랑의 시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맛없는 음식을 만들어 놓고도 억울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있어 그녀의 음식이 맛없다는 불평은 그녀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했었다. 자신은 한번도 누군가 자신이 아닌 한 남자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날 자신이 시장에서 한 남자를 위해 음식을 고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스스로도 크게 놀랐다고. 나는 결국 그녀가 만드는 음식이 상업적 목적의 음식과 달리 음식의 재료를 사랑으로 소화한 독특한 산물이란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 나는 조용히 입닥치고 차려주는대로 묵묵히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그녀는, 우리의 아이에게, 너네 아빠는 음식 하나만큼은 아무 타박없이 잘 먹는단다라고, 아이가 본받아야할 점의 하나로 항시 입에 올리게 되었다.
2 시 이야기
나는 시인의 시를 요리의 산물로 이해한다. 언어를 요리한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시의 핵심을 시사하는 뜻깊은 말이다. 시는 그런 점에서 나의 아내가 음식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시의 질료에 대한 소화의 과정이다. 그것은 어떤 질료를 나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대상의 전달에 가장 충실한 예는 신문 기사일 것이다. 그것은 가급적 사실을 정확히 옮기는데 최우선 순위를 둔다. 전달의 과정에선 산지의 배추와 무우를 장터로 거의 그대로 옮겨가는 것에 최우선 순위를 두게 된다. 기사가 그렇다. 때문에 기사를 통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현장을 사실적으로 볼 수 있거나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는 다르다. 시는 현장의 전달이 아니라 현장을 버무리고 주물러 요리해낸다. 우리들이 시에서 때로 그 연원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연원을 추적해 들어가는 작업은 힘겹기도 하지만 아울러 아내의 사랑을 깨닫게 해준 음식의 경우처럼 의미깊은 결과를 안겨주곤 한다. 나는 이번에 그 연원을 짐작하기 쉬운 몇 편의 시들을 골라 여행의 행선지로 삼았다.
내가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겨놓은 곳에선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자, 자, 여기를 보세요. 찍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들의 앞에서 카메라를 든 사람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순간 사람들이 지금까지의 요동을 일제히 멈추면서 카메라를 응시했을 것이다. 시선이 한자리로 모였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을 것이다. 그 잠시간의 침묵과 한자리로 모인 시선들. 내가 그 자리에서 본 것은 이렇듯 길고도 장황하다.
…… 보고 있다.
시인은 그것을 이렇게 간단하게 버무린다. 앞쪽에 있는 말줄임표의 효과를 우리들은 여실히 깨닫는다. 그 현장에 잠깐 동안 깃든 침묵이 그 속에 응축되어 있으며, “보고 있다”는 간략한 말은 카메라의 렌즈로 모인 시선을 여실히 보여준다.
때로 아내는 날 것을 그대로 밥상 위로 올린다. 오이가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접시에 덩그러니 올려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한 전달로 오해마시라. 아내는 그것을 진주빛 흰색의 접시에 담아 그 초록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배려한다. 그 배치는 그 날 것이 전달이 아니라 실제로는 소화된 요리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시선이 오이에만 모이면 우리는 그 오이가 요리된 결과임을 잊기 쉽다. 그 오이가 요리된 결과임을 인식하려면 시선의 폭을 넓혀 오이를 적절하게 배치해놓은 접시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때로 우리는 현장의 사실적 전달을 최우선 순위로 하는 기사와 그 현장을 요리한 결과의 산물인 시가 혼동스러울 때가 있다. 두 언어가 너무도 똑같기 때문이다. 그 혼동을 제거하고 요리된 현장의 맛을 맛보려면 언어가 배치된 구조에 눈 떠야 한다.
시인은 그 짧고도 간결한 문장으로 시의 서두를 연 뒤에 그만 사족을 붙이고 만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정물처럼, 정물의 그림자처럼
제자리에서 다소곳이
정면을 향하여 응시하는 우리.
그렇게 숨을 멈추고, 가슴 엑스레이를 찍는
순간처럼
몇 걸음 앞 카메라의 눈을 향하여
사진사의 조심스러운 지시에 따라
한 장의 커트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가
찰칵!
울린 셔터의 짧은 기계음과 함께
과거 속에 아름답게 박제되는 우리.
–이수익, 「기념사진」(현대시, 2001년 5월호)
내가 보기에 이 시에서 앞의 한줄 이외에 필요한 부분은 없다. 그 나머지 부분들은 필요악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마저 사실은 시인의 정성어린 요리의 결과이다. 내 입맛에서 걸음을 양보할 줄 몰랐을 때, 아내와의 사이에 음식을 사이에 두고, 갈등은 끊이질 않았다. 나는 이제 그간의 내 태도를 버리고 시인을 이해하기로 한다.
두번째로 이번에는 일반적인 아내의 요리처럼 시의 언어가 완전히 뒤바뀐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이제 새로움을 만난다. 그 새로움을 만난 자리 중의 하나는 여름날의 저수지이다. 바람이 자는지 그 저수지는 미동 한 점 없다. 전혀 움직임이 없다. 수면은 잔잔하다. 돌을 하나 들어 그 수면 위로 집어 던진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내가 그 순간 보는 것은, 그리고 사람들이 그 순간 흔히 보는 것은 바로 그러한 동심원의 물결이다. 그러나 시인이 요리한 결과는 그렇지 않다.
중심을 들킨 듯
와,
둥글게 퍼져가는
눈부신
소문!
그 질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요리되어 있다. 물론 내가 산문의 형식으로 길게 늘어놓은 저수지의 잔잔한 수면과 그 곳의 한가운데로 돌멩이를 던져보기까지의 과정은 사실은 시인이 첫구절에서 짧은 언어 속에 응축시켜 놓고 있다. 아마도 그 구절이 없었다면 시인이 요리해낸 이 결과가 무엇을 버무린 것인지 짐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시인은 같은 현장을 또 다른 요리로 이렇게 바꾸어 놓고 있다.
나른한 정오가
확,
잠에서 깨어난 듯
살아서 붐비는
파문!
–김선태, 「파문」(현대시, 2001년 5월호)
대체로 사람들은 많은 시를 이런 차원에서 이해한다. 음식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버무리고 조리하여 형태를 바꾸어놓아야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시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이 그러하기 때문인지 시 또한 이러한 종류의 시들이 가장 많은 듯하다.
이러한 시들은 우리들의 미각을 돋운다. 그것은 새로운 맛이기 때문이다. 그냥 일상적으로 보면 잘익은 밤이 반쯤 갈라진 밤송이 속에서 기름진 빛깔로 영글어있을 뿐이다. 그러나 보시라, 그 상투적 현실은 이렇게 요리된다.
부풀어오르는 밤알의 힘에 못 이겨
가시 돋친 푸른 가죽이 힘차게 찢어져 있다.
숨어 있는 밤알들이 눈알처럼 초롱하다.
–김기택, 「썩은 밤을 줍다」(현대문학, 2001년 5월호)
노인의 눈은 희미하고 힘이 없다. 그렇지만 그 노인의 눈도 젊은 여자가 지나가면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모른다. 그때 노인의 눈은 희미하지만 젊은 여자에게 고착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가 보는 현실의 상투적 현장이다. 시인은 이렇게 요리하고 있다.
노인은
구운 물고기 눈알처럼 딱딱한 눈으로
젊은 여자의 공격적인 가슴과
길고 흰 다리를 쳐다본다.
–김기택, 「노인의 힘」(현대문학, 2001년 5월호)
해변에선 파도가 하얀 포말로 부서졌다가 사그러지고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시인은 그 해변의 풍경을 이렇게 변주한다.
해변 따라 벚꽃처럼 하얗게 피는 파도꽃
피자마자 꽃잎처럼 흩어지는 파도꽃
–김기택, 「파도꽃」(현대문학, 2001년 5월호)
전철을 타고 가다 보면 차창 밖으로 밭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봄날엔 그 밭에 아직 아무 것도 심은 것이 없어 밭들이 흙빛 그대로이다. 그 밭에 대한 시인의 요리 결과는 이렇다.
운정역에서 탄현역 사이의 철로변 밭들은 봄을 맞아 배 째고 드러누워 있다…
–성윤석, 「구름의 우물역에서 오는 기차·3」(현대시학, 2001년 5월호)
예를 뽑아내자면 끝이 없을 것만 같다. 이런 형태로 요리된 시의 구절들은 새롭고 신선하긴 하지만 때로 그 연원을 짐작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그때 시인들이 어떤 현장이나 삶의 한 순간을 소화한 결과로 태어난 그들의 요리, 즉 그들의 시는 그들의 시로 그칠 뿐, 읽는 이들이 그 맛을 음미하며 자양분으로 소화하기에는 너무 멀고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경우에도 이제 시인을 이해해 주기로 한다. 나는 아내가 만든 음식 앞에서 때로 나의 혀끝으론 도저히 그 맛의 정체를 구별해내기 어려워 그 난해함이 소화불량으로 연결된 적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조리하던 순간의 아내의 심정은 사랑이었으리라 믿기로 했다. 시의 앞에서도 나는 똑같은 배려를 하기로 한다. 다만 그런 경우 나의 소화불량은 어쩔 수가 없다. 아내의 경우와 달리, 시를 골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나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경우는 내가 아내의 손끝에서 요리가 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이다. 아내는 때로 주변을 모두 두터운 어둠으로 치장하고, 탁자 위에만 작은 촛불을 켜놓는다. 그러면 사물의 윤곽을 부드럽게 무마하는 한움쿰의 빛이 그곳에 마련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옆에 장미 향기를 곁들여 후각을 자극하도록 해놓는다. 포도주 잔이 빠져선 안된다. 접시 위에선 노란색 치즈가, 말린 계란 사이에서, 흘러내릴듯 말듯 포개어져, 알듯말듯한 엷은 미소를 흘리고 있다. 내가 그런 순간에 받는 느낌은 아내가 마련해준 음식을 앞에 놓고 있다기 보다 마치 내가 요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내는 또 한가지 음식의 비밀을 캐낸 것인지 모른다. 한 남자를 위해 음식을 마련하던 그 끝에서, 그녀는 드디어는 그 남자 자체를 요리하여, 그 남자 자체를 하나의 요리로 식탁 위에 올리고, 한 남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해 그를 맛보는 전혀 색다른 세계에 눈뜬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내는 시의 비밀 또한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 또한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퀵 서비스는 말 그대로 빠른 서비스이다. 퀵 서비스 업체들은 오토바이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 시간에 어김없이 배달해준다. 물론 나도 퀵 서비스를 즐겨 이용한다. 번역할 원고를 가져올 때 나는 퀵 서비스로 보내라고 말하곤 한다. 두 시간을 넘기지 않고 오토바이 아저씨는 어김없이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퀵 서비스의 영역은 그러니까 고작해야 서류나 작은 물품을 주고받는 용도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데 시 속에선 그 퀵 서비스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이 나를 기다린다.
봄이 오면 제비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씀바귀가 자라면 입맛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비 내리는 밤이면
빗소리에 발정 난 고양이 울음소리
덤으로 얹어 드리겠습니다 아기들은
산모의 자궁까지 직접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진다면
언제든지 상품권으로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꽁치를 구우면 꽁치 타는 냄새를
노을이 물들면
망둥어 뛰는 소리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정경유착이 용이하도록 국회와 증권회사는
여의도에 몰아 놓겠습니다
돌아가신 이들의 혼백은
가나다순으로 잘 정돈해 두겠습니다
가을이 오면
제비들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쌀쌀해지면 코감기를 빌려 드리겠습니다
–장경린, 「퀵 서비스」(현대문학, 2001년 5월호)
나는 순간 내가 퀵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자체가 퀵 서비스의 대상이 되는 당혹스런 경험에 직면한다. 가끔 시는 그렇게 우리 앞의 요리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요리하려 든다.
3 시인에게 축복있기를
음식의 질료는 제한적이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독버섯을 음식의 재료로 삼을 순 없다. 하지만 질료의 측면에서 본다면 시의 요리에 제한은 없다. 기념 사진의 현장에서, 저수지, 가을날의 밤알, 젊은 여자를 따라가는 노인의 시선, 파도, 전철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밭, 그리고 퀵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시는 요리된다. 심지어 아픈 상처들마저 그것을 버무리는 시인의 손끝에서 우리가 음미하며 생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 요리로 영근다. 나는 이번에 그 만찬에 초대받았다. 언어를 궁글려 그 만찬의 식탁을 풍요롭게 가꾸어가는 시인들에게 축복있으라.
(『현대시』, 2001년 6월호, 월평)
4 thoughts on “시의 만찬에 초대받다”
제가 시 쓴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
선배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갈치를 구우신다고
저보고’ 갈치’시를 써 보라나요
갈치 시를 어찌 쓰냐고 하면서 웃었지요
근데 스케치북을 펴 놓고 바다를 그리면서
이 생진님의 성산포시를 떠 올리면서 써 보았어요
그 언니는 제 시 중에서 갈치 시가 제일 좋다나요…ㅋㅋ
남편도 참 좋아해요
동원님이 읽으시면 어찌 평하실지 모르지만요
만찬의 식탁~
시인의 눈길은 다른이들이 요리하지 않은 비법을
풍요롭게 꾸미는 엣 어머니의 손맛이라고 할까요
감칠 맛 나는 글… 요즈음~공부 많이 하네요..항상 감사를 드려요~!
웬지 동원님은 음식 잘 하실 것 같아요..**^
결혼 초엔 좀 했는데 요즘은 라면밖에는 할줄 아는게 없어요.
먹는 건 그냥 배부르면 만족하는 스타일이라…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요리나 음식만들기에 대해서는 문외한도 그렇게 문외한일 수 없는 저희 남편이 어느 해 제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줘 볼 생각이었는지 ‘미역국은 어떻게 끓이는 거야?’ 하더라구요. 저는 놀려줄 생각으로 ‘미역 넣고 고추장 확 풀고, 고추가루도 넣고…막 끓여’ 했는데 심각하게 잘 듣고 있는 거예요. 그 순간 요리에 관한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몇 백 배 더 문외한이란 걸 다시 깨달았지요. 가끔 제가 요리할 때 옆에서 도울 때가 있는데 그렇게 몇 번 도와본 음식에 대해서는 음식맛을 품평할 때 쓰는 형용사가 달라져요.^^
어느 댁에서 들은 건데 독일에서 오리요리를 하면요(아마 꼭 오리요리뿐 아니겠죠) 먹기 전에 요리를 한 안주인이 그 날의 요리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시간이 있대요. 특별히 어떤 맛에 신경을 썼는지, 어떤 재료를 썼는지….등등요. 글을 보니깐 이런 과정은 요리를 그냥 맛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맛을 이해하고 먹는데 일조할 것 같아요. 저도 ‘삶은 요리’ 로서 이런 방식을 좀 도용해볼까 생각 중이예요.^^
동원님의 시평은 땀 뻘뻘 흘리고 요리를 마친 후 기진맥진 말 할 기운도 없는, 그저 음식이나 할 줄 알지 말주변은 없는 주부를 대신해서 요리의 질료, 요리의 과정, 무엇보다 요리에 담긴 주부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 주시는 듯 해요. 시인들이 고마울 것 같아요.^^ 가끔 저는 시를 보면서 도대체 질료조차 파악이 안 돼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도매금으로 넘길 때가 있거든요. ^^;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런 긴 글은 읽어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