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되어 오르리라 ─ 백무산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시집 표지

1
시에 대하여 그것의 옳고 그름을 물어야 할 때가 있다. 수학 문제의 해답처럼 맞다 틀리다를 가르기가 분명치도 않고 또 수월치도 않지만 그러나 그 질문을 회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시가 자신의 성채 속에서 국화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또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낸 뒤의 아픈 가슴을 쓸고 있을 때, 우리는 옳고 그름으로 편을 갈라 그것을 엄격히 재단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런 시를 대했을 때 우리는 즐긴다, 향유한다. 연인을 잃은 아픔도 시의 성채 속에서는 언어의 휘장으로 곱게 단장되어 사람의 가슴을 파먹기보다 오히려 풍요로운 아름다움으로 승화 된다. 시는 갈중난 목을 식히는 물이 되고 막힌 코를 뚫어 가슴에 시원한 바람으로 번진다. 그것은 즐기고 향유할 대상이지 결코 옳으냐 그르냐의 대상이 아니다. 탐닉적 즐거움이 육체와 정신을 좀먹는다면 그러한 문학의 즐거움과 그에 대한 향유는 오히려 육체와 정신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는 찬사가 아득한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즐기고 향유하기 위하여 약간의 수고는 있어야 하리라. 운동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다소의 육체적 노고를 훈련이란 이름으로 곁들여야 하듯이.
그러나 때로 우리들 앞에 나타난 시는 그와 명백한 구별선을 긋는다. 세계 속에서 서로를 적의 이름으로 부르며 맞서 있는 대립된 두 개의 축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편들며 적에 대한 성토와 그에 대한 우리의 뜨거운 투쟁을 다짐하는 열기높은 목소리로 다가선다. 이제 세계는 시 속에서 옳은 쪽과 그른 쪽으로 양분되고 그리하여 시는 적을 향하는 창이 되고 칼이 된다.
백무산의 시도 어느 한쪽을 편든다. 그가 편드는 쪽은 노동자이고 민중이며 그 맞은 편에는 자본가와 권력자, 외세가 서 있다. 그는 이 대립적 구조 속에서 자신의 시가 그 중 이쪽 한쪽을 편들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당파성’이란 말로 묶이는 이러한 그의 시적 경향은 분명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아니 드러냄을 넘어서서 이는 타인까지 이러한 당파상으로 물들이겠다는 의지를 타고 주위로 퍼져나간다.

편견을 갖고 돌아오라
노동자의 편견이 없는 자는 노동자가 아니다
─「편견을 갖고 돌아오라」

이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물론 이때의 선택은 복합적이다. 문학의 영역 속에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포함하여 만약 이 싸움에 내가 뛰어들었을 경우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 등이 포괄된다. 그러면 나는 어떤 기준에 의하여 시를 버리며 또 취할 것인가.
우선 나는 이 싸움에서 어느 편에 붙었을 때 나의 물질적 이익이 더 많이 확보될 것인가를 따져 보며 그것으로 선택의 기준을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이익 추구를 예외없이 보장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들어 폐기된다. 즉 나는 남의 집에 슬쩍 숨어들어 그들의 재산을 훔치는 방법으로 나의 개인적 이익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으나 아무도 나의 그런 이익을 용납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 다시 말하여 방법을 불문하고 개인의 이익 추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들어 폐기된다. 그러므로 선택의 기준으로 나의 개인적 이익은 합당한 근거가 되지 못하며 이는 노동자 계급이라는 집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자의 이익을 부르짖었다고 해서 시가 선택될 수는 없다.
다음으로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립의 위치에 자리를 차릴 수 있다. 그때 나는 이 싸움의 강건너 구경꾼이 된다. 그러면서 나는 입을 다물고 내 일에 열중한다. 그러나 나의 침묵을 아무런 양해없이 ‘말없는 다수’라는 수식어구 밑에 포장하여 안정을 희구하는 목소리로 왜곡하는 현실 속에서 과연 그런 중립지대의 안정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중립지대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는 폐기된다.
마지막으로 나는 바로 백무산의 시에서 그가 분명히 밝히고 있는 ‘편견’의 정당성을 곰곰히 따져봄으로써 내 선택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 이때 시는 그것이 옳기 때문에 선택되며 그 반대일 때 폐기된다. 칼이 지닌 폭력도 때로 정의의 이름으로 불리워오지 않았던가. 편견의 정당성이 확보되었을 때 그러므로 시는 문학적인 가치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며, 창이며 칼인 시를 집어듦에 우리들은 스스럼없게 되리라.
그렇다면 백무산의 시는 과연 옳은가. 그것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그의 시를 찬찬히 따라가 봐야 할 것이다. 길을 떠나도록 하자.

2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다. 시도 그 한 편 한 편이 모여 숲을 이룬다. 처음 그 숲을 지나갈 때 우리는 길을 알 수 없었으나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진 뒤로 길이 생긴다. 나무들 하나하나를 소홀히 지나치지 않으면서 그 숲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살펴갈 수 있는 길이 있으리라. 백무산이 가꾼 시의 숲으로 걸음을 뗄 때 그리하여 우리들이 비롯하는 자리는 그의 고향이다.
그의 시에서 고향은 그 한쪽에 “실개천 징금다리 송사리떼”의 풍경을 채우고 있다. 거기엔 “나풀대는 붉은 댕기에 햇살을 흩으며/치맛자락 살짝 걷고 사푼한 코고무신/마른 풀잎을 딛고 산길 밟고 오”는 ‘가시내’가 있다. ‘종달새 울움소리’가 있고 ‘능금 꽃잎’이 떨어지며 바람에 흩날린다. 그 고향에서 ‘목수’일을 했던 아버지는 “한 그릇 국수, 막걸리 한잔에” 근육의 힘이 솟는다.
고향은 전원적이며 현대 문명에 찌들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이 건강한 삶을 엮어가고 있는 장면으로 그 한 면을 채운다. 그 고향은 돌아가고 싶다는 향수의 대상이다. 향수의 대상이란 점에서 그는 고향을 떠난 사람이다. 이 사실은 백무산의 시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이 모두 공유하는 사항이다. 그러면 왜 그들은 고향을 떠났을까? 전원적 풍경으로 시골을 미화시키면서 삶의 현장으로서 그것이 지니게 될 치열한 현실성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는 도시인의 거짓의식에 그도 함몰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다. 그의 시 속에서 고향은 전원적 풍경과 더불어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의 고향은 가난하다. 시 속에서 이는 그리 크게 강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중학교를 못다 졸업하고/무슨 탈곡기 공장엘 갔다”는 고향 친구의 얘기에서 우리는 가난을 만질 수 있으며 ‘돈 잘’벌고 “아파트도 그저 주고 보나스도 많다”는 부추김에 ‘노고재’를 넘어 고향을 뜨는 모습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평생 가난의 무게로 휘청이시며” 살아오신 어머니의 삶에 의하여 어제에 머물지 않고 오늘의 고향으로 이어져 있음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잘살고 싶어 고향을 떠났다는 결론이 유도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이 정당한 것일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아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니다. 풍운의 꿈을 안고 제 발로 고향의 어귀를 나와 부모님, 형제들 전송 받으며 설레이는 가슴으로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더 이상 살 수 없어 그곳을 버리고 밀려났다, 쫓겨나고 축출되었다.

너꺼무떠거랄, 떠나라 하네
선진조국 대로 위에 새로난 고갯길로
언제 또 볼거나 봇짐을 싸야 하네
이제 가면 천길 만길 잠길 땅
눈물 떨구며, 가슴 털리며 봇짐을 싸야 하네
북녘땅 실향민이면 꿈이라도 청하련만
밤마다 털리는 가슴, 꿈마다 찢기는 그물
잊어라 하네, 저 갯내음을
몸에 밴 파도의 떨림을
─「너꺼무떠거랄」

무엇이 그들을 쫓아내고 축출했는가. 그것은 “아름답던 작은 어촌”에 박힌 ‘쇠말뚝’, 즉 산업의 물결이다. 그 물결이 어촌을 덮치자 이제 그곳에는 “엉덩이를 까놓고 은빛 모래사장 뒹굴던 아이들”의 풍경 대신 조선소가 들어서며 일하다 떨어져 죽는 노동자들의 죽음으로 그곳에 핏망울의 흔적이 번진다. 또한 산업의 물결은 “수은역신 카드뮴역신 닥치는 대로 불러들여”고기를 떠나게 하고 미역을 떠나게 한다. 그리하여 ‘콘크리트 빌딩’에 밀려 고향에서 목수일을 하며 집을 짓던 아버지가 무너지듯 우리들은 그들의 가난이 ‘성장의 제물’인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등을 밀려 고향에서 쫓겨나고 축출되었다.
그렇게 쫓겨난 사람들의 가슴에는 당연히 한이 쌓인다. 그의 시가 ‘용왕님전’ ‘성황님’ 전에 올리는 치성의 형식을 빌어 한풀이를 노래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향수의 대상으로서 전원적 풍경을 한 고향은 과거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향이 과거에서 미래로 옮겨지는 시점의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공사장에서 만난 옛친구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우리의 고향도 포기할 때
그 강의 꿈도 지워야 할 때인데
아직도 종달새 울음소리 그립다는 친구야
언젠가 우리들 세상, 고향 뒷산 메아리처럼
간 만큼 되돌아오는 세상
그런 세상 만드는 일이 그리움이며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될 것이네
─「공사장에서 만난 고향친구」

고향은 그리하여 참된 세상이란 의미를 띠고 우리들이 미래에 이루어야 할 목적이 된다.
전원적 풍경의 고향을 참된 세상이란 의미로 전환시킨 뒤 그것을 미래의 시점에서 꿈꾸는 그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공사장을 떠돌거나 공장에서 일한다. 고향을 쫓겨나 무엇이 되었는가? 노동자가 되었다. 노동자가 되어 어떤 삶을 겪는가? 속고 빼앗긴다. 누구에게?

누군가 공장 안에
꺾어 둔 민들레꽃
바람 불어 기계 속에
맞물려 돌았다

노란 꽃잎이 바수어지고
기계음에 가려서 꽃잎이
우는 소리 듣지 못해도
그로부터 모든 맞물린 곳에서
꽃잎이 바수어져 우는 소리 들린다
─「민들레」

민들레꽃이 기계에 맞물려 가루가 되듯 일차적으로 그들의 몸을 부수는 것은 기계이다. 일을 함으로써 노동자의 육체는 시든다. 일 자체가 육체를 망치는 것은 아니다. 망가지는 몸을 일으켜 세울 만큼의 휴식과 생활이 자신들의 임금으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자 노동자는 “5프로 봉급 인상”을 외치며 일어선다. 그러나 이번에는 “협박과 분열과 회유”를 앞세워 ‘기업주’가 이들을 무참히 짓밟는다. 노동자는 다시 부서진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구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보수 정당의 공방”이라는 정치의 맞물림 속에서도 부서지는 것은 노동자이며 “의도적 줄다리기 남북회담”의 맞물림도 노동자를 부수는 결과를 초래한다. 위선의 종교가 “거짓 사랑의 헐떡거림/거짓 자비의 목탁소리/거짓 설교의 동전소리”로 또한 노동자를 부순다. 그리하여 그는 노동자들이 서 있는 삶의 현장에서 자기완성의 노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먹이 사슬’의 질곡을 보며, 어느 놈의 “먹이가 되어 칼질을 당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동자는 죽어가고 절망하고 가난에 묻힌다.

밤안개 젖었구나
뿌연 가로등
사는 일이 고달퍼라
빈손으로 돌아가는 가슴 아픈 시간
공장의 불빛도 빛을 바래고
─「김씨의 사랑노래」

톱밥난로가 다 꺼질 때까지
너는 기도를 잇지 못하고
우리는 그저 끝없이 잠겨 흘렀지
되풀이된 절망에 또 한번의 기원으로
내밀던 우리 손에서 하나님의 낡은 옷자락은
움켜쥔 마디마디 끊어지기만 했을 뿐이었다
─「저녁기도」

부속병원 정원에 갈꽃도 지고
떨어져 죽은 인부들의 빛바랜 초상화가 빗속에 흐느꼈다
─「지옥선·5」

모든 것이 가라앉는다. 밑으로 밑으로 침몰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가라앉음 속에서 그와 정반대의 솟아오름을 보게 된다.
그 솟아오름은 우선 기존의 세계가 지니고 있는 질서를 정반대로 뒤집어 엎으면서 옳다를 그르다로, 그르다를 옳다로 뒤바꾼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말하면서 지적한 대로 ‘취업정보지’는 직업알선을 위한 안내 책자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인 음화” “속이 곪은 기업가의 버젓한 낙서판”이 된다. 주거환경을 개선한다는 명목의 ‘철거’ 작업에서는 적에 의해 우리들 삶의 본거지가 약탈되는 야만성을 본다. ‘경찰’은 노동을 인질로 잡아다가 흥정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납치범들’이다. 그리하여 옳다는 그르다가 되고 그르다는 옳다가 된다.
다음은 의미와 용도의 변용이다. 앞서 살핀 질서의 전복은 양편의 공존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쪽이 옳을 때 저쪽은 그르며 저쪽이 옳을 때는 이쪽이 그르다. 둘다 모두 나름대로 옳을 수도 있고 또 그를 수도 있다는 이중성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미와 용도의 변용은 공존이 허용된다. 예를 들어 장미는 아름다운 꽃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한 여인을 사랑할 때 장미는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적절히 전해 주는 수단이 된다. 장미는 그러므로 꽃의 일종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사랑이라는 의미로 또한 읽힐 수 있다. 내가 사랑하고 있을 때 여인에게 건네주는 장미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바로 사랑, 그것으로 변용된다. 사랑은 그 상황에서의 정확한 장미의 의미이다. 그러한 의미와 용도의 변용은 백무산이 노동자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그가 작업할 때 사용하는 공구를 통하여 나타난다. 공구는 그리하여 ‘무기’가 된다. 이 변용된 시각 속에서 ‘지게차’는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위풍도 당당하”게 사람들을 이끌며 “가스차 허리를 꽂아 꼬나박기로 해치운다”. ‘망치’는 “두드려라 그러면 부서질 것이다”라는 진리를 발한다. ‘톱’은 “무수한 이빨들이 모여 한꺼번에/물어뜯어야”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넘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일러 주면서 연대라는 무기의 의미로 읽힌다. 의미와 용도는 변용되고 그리하여 “일과 싸움은 하나/공구와 무기도 하나”가 된다.
마지막으로 김우창이 백무산을 제1회 이산문학상 시부문 수상자로 뽑으면서 그의 시가 지닌 한계성으로 지적한 부분적 상투성이 그와 같은 부정적 평가와는 달리 솟아오름의 한 양태가 된다. 김우창은 경영자나 자본가가 반드시 사우나를 하고 양주를 마시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일까, 미국인 조선 발주자는 뇌물로 바쳐지는 한국 여자의 성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것일까를 물으며 이러한 인식이 “진실의 전면적인 고찰을 방해”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백무산의 시 속에 노정된 이 상투성이 방법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반박된다. 생각해 보라. 경영자나 자본가가 노사의 가족 관계, 부부관계를 내세우는 현실 속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인식 세계가 어떤 풍경을 할 것인가를. 그것은 투쟁을 외치는 노동자보다 화합을 말하는 자본가들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된 사람들이라는 방향으로 기울면서 자본가에게 긍정적인, 노동자에게 부정적인 인식의 지배 질서를 형성할 것이다. 우리들이 미국인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의 세계는 또한 어떠한가. 지금은 공공연해지다시피 됐지만 그러나 반미라는 의식의 보편적 형성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우리들은 미국인들이 뇌물에 엄정하고 그들이 사는 미국은 일한 만큼 돌려 주는 정의와 평등의 땅이라는 인식을 뇌리 깊숙히 안고 살아왔었다. 우리의 뇌 속에 박혀있는 그러한 인식 또한 “진실의 전면적인 고찰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백무산의 시가 보여주는 부분적 상투성이 그러한 지배체제의 상투적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며 진실의 전면적 고찰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그의 부분적 상투성은 방법론적 상투성이기도 하다. 그 점에 의하여 이 또한 한계라기보다 솟아오름의 한 양태로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이 솟아오름이 응결된 총체를 가리켜 사람들은 ‘노동자 의식’이라고 부른다. 그 의식 속에서 이제 세계는,

피땀 어린 고귀한 생산자의 밥의 나라냐
착취와 폭력의 수탈자의 밥의 나라냐
─「만국의 노동자여」

에 따라 이분화된다. 이 이분화된 세계 속에서 “공장에서 벗어나는 일이 소원이던” 노동자가 오히려 그 세계에 굳건히 서고자 하는 의지를 발분한다.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펄펄 살아 튀는 밥을 먹으리라
먹은 대로 깨끗이 목숨 위해 쓰이고
먹은 대로 깨끗이 힘이 되는 밥
쓰일 대로 쓰인 힘은 다시 밥이 되리라
살아 있는 노동의 밥이

목숨보다 앞선 밥은 먹지 않으리
펄펄 살아오지 않는 밥도 먹지 않으리
생명이 없는 밥은 개나 주어라
밥을 분명히 보지 못하면
목숨도 분명히 보지 못한다

살아 있는 밥을 먹으리라
목숨이 분명하면 밥도 분명하리라
밥이 분명하면 목숨도 분명하리라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살아 있는 노동의 밥을
─「노동의 밥」 전문

“피가 도는 밥”은 피를 돌게 하는 밥이다. “펄펄 살아 튀는 밥”은 같은 논리의 선상에서 우리들을 살아서 펄펄 튀게하는 밥이다. 그러므로 밥은 여기서 생명을 낳는 원천이다. 이러한 밥을 그는 ‘노동의 밥’이라고 부른다. 그 노동의 밥, 생명의 밥에 대립되는 것이 “목숨보다 앞선 밥”이다. 목숨과 밥은 전자가 목적이고 후자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이란 관계를 형성한다. “생명이 없는 밥”은 바로 그 목적과 수단의 관계가 전도된 밥이다. 밥이 목적이 되고, 목숨이 밥을 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질 때, 밥은 목숨보다 앞선다. 이때 밥은 생명을 낳고 피를 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억누르고 옥죈다. 그러므로 “밥을 분명히” 본다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목적이 어디에 있어야 하며 무엇이 수단의 자리에 가야 하는가를 주시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목숨이 밥에 대한 수단으로 도치되면서 수단에 불과했던 밥이 목적의 자리로 밟고 올라서는 반전된 세상을 거부하겠다는 의지이다.
그의 시를 말한 사람들에 의해 노동계급적 당파성으로 선이 그어진 이러한 의식에 밑받침되어 노동자의 자기 세계에 대한 굳건한 의지가 일어선다. 이 의지는 지금의 것을 그대로 지키겠다는 보수의 의지가 아니라 오늘을 바꾸고 고쳐 새로운 내일를 이룩하겠다는 변혁의 의지이다. 그 의지는 죽음이 소멸이 아님을 이른다. 죽음은 떠나지 않고 남아 산 자의 손을 기다리고, 산 자는 죽은 자의 침묵을 일으켜 세운다.

기계톱 속 맞물려 아직도 내 벗님들 핏덩이 튀는데
못가겠네 억만 사천 바람 일고
울었음 울었지 아 이대로는 아니 가겠네
흐흐흐 휘휘 흐흐
─「지옥선·8」

여보게 일어나게
겨울비에 젖은 옷 어서 털고 일어나게
녹은 빙판처럼 우리를 쓰러뜨리는 것
겨울이 아닐세 찬비가 아닐세
─「지옥선·6」

이리하여 소멸의 죽음으로부터, 절망의 가난으로부터 노동자는 일어선다. “쓸데없는 자격지심에 어깨 늘어뜨리고/마구잡이로 살며 닥치는 대로 들끓으며/못난 놈들끼리 못난 싸움이나 벌이고/덜 무식한 놈이 더 무식한 놈을 비웃”던 노동자가 “서로 기대어” 어깨를 걸고 하나되어 일어선다. 일어선 노동자는 바다가 되고 깃발이 되어 파도를 일으키고 불로 타오른다.

폭염을 다스리는 태풍처럼
폭정의 역사를 다스리는 불꽃이 되어
가자, 15만 동해군단 전사가 되어
가자, 일천만 노동군단 전사가 되어
가슴마다 피 물결 번지고
파도가 번지고 범람하는 해일이 번지며
넘치는 파도 분노의 바다가 되어
가자, 벗들의 슬픔을 넘어, 시신을 넘어
갖은 기만, 거짓 선전, 분열의 검은 손,
음모의 갈쿠리를 꺾고 뭉쳐 하나 되어
가자, 온몸이 함성이 되어 버린 동지들
그 깃발에 불 붙여 흔드는 동지들
가자, 수천 고지의 산맥도 단숨에 치달아
제국주의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자본가의 양심에 도덕에 죽창이 되어
가자, 자유와 평등 노동해방의 깃발을
앞세우고 전진하는 노동자
전진하는 전사 노동전사가 되어
─「전진하는 노동전사」

백무산이 가꾼 시의 숲으로 걸음하였을 때 처음 그가 문을 열어 준 곳에서 우리들이 본 것은 전원적 풍경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그 고향의 사람들은 성장의 제물이 되고 또 그곳을 덮친 공해의 물결에 밀려 제 살던 곳에서 쫓겨나고 축출된다. 고향을 참된 세상이란 의미로 전환시키면서 미래로 옮겨놓고 있는 그는 그리하여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속고 빼앗기며 죽음과 가난으로 이어지는 삶이었다. 그 침몰과 하강의 상황 속에서 기존의 지배체제가 우리에게 세뇌시킨 선진조국, 복지국가의 이데올로기가 허구임을 드러내는 새로운 세상 읽기의 시선이 싹튼다. 그렇게 하여 자라난 새로운 의식에 밑받침되어 노동자의 해방된 앞날에 대한 의지가 쌓이고 이는 죽음과 절망으로부터 노동자를 일으켜 세운다. 숲을 빠져 나오며 그리하여 우리들은 보게 된다. 손잡아 하나되어 파도가 되고 깃발로 펄럭이며 투쟁을 말하는 가열찬 몸짓을.

3
백무산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그의 시가 창이 되고 칼이 되어 투쟁을 말하게 되기까지의 흐름을 함께 하였다. 그 과정에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그가 말하는 편견이 어느 한쪽을 편드는 반쪽의 주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본가의 이익을 위하여 체제를 편재해 놓은 지금 여기 이 세계의 반쪽 이데올로기에 맞서 그것의 허구를 폭로하는 저항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지닌다.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 부르짖었던 민족의 자존과 독립의 목소리가 그랬듯이. 그리하여 그가 말하는 편견은 정당성에 이르게 된다. 그 정당성의 획득은 그에게서 싸우자는 투쟁의 의지로 연계된다. 그리하여 그는 말한다. 깃발되어 오르리라고. 아니 그는 투쟁의 앞자리에서 깃발로 펄럭이며 우리들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나가자, 싸우자, 투쟁하자 라고 소리지를 수 없다. 싸움은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용렬하게 보이고 조금 배운 먹물들의 한계로 논박되겠지만 나는 부끄럽게도 옳은 것을 알고도 아직 목숨을 내놓지 못하는 몸이기에 그처럼 투쟁을 외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는 바로 그의 시가 옳다는 정당성의 논증에서 그친다. 나는 여기서 물러나고 만다. 이 물러남의 밑바닥에 내 몸의 안위를 걱정하는 나약함이 숨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나로서는 그러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비겁하다.
이제 매듭의 자리에 새기는 나의 마지막 말.
투쟁은 매우 강렬한 열망에 기초한다. 그러나 열망이 강하면 그것은 다가올 미래 세계에 대해 오히려 환상의 안개막으로 작용한다. 환상의 안개막은 미래의 세계가 지니게 될지도 모를 허점에 대한 우리들의 투시력을 차단한다. 그러므로 백무산의 시에서 우러나는 감동의 진국을 마신 나는 좋은 글을 대했을 때 누구나가 맛보는 가슴의 훈훈함과 기쁨을 안아가는 한편으로 그의 시가 지닌 허점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경고는 투쟁을 약화시킨다는 부정적 측면이 있음을 미리 알려 그의 시가 걸어가는 오늘의 길이 흔들리지 않길 바라는 내 마음 함께 덧붙여 둔다.
백무산은 이런 세상을 꿈꾼다.

더 좋은 봉급이 있는 곳도 아니야
더 짧은 노동시간의 일터도 아니야
덜 거친 일터가 있는 것도 아니야
인간다운 대접도 이제는 싫어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땅으로 가는 거야 갈 수 있고 말고
─「해방공단 가는 길·3」

그 땅은 자본가가 없는 세상이리라. 오직 일하는 자만이 있는 노동자의 천국이리라. 그러나 몸으로 실천하고 또 시로 실천하는 그대여, 내 경고하노니 그대 꿈꾸는 세상이 이루어져 노동자만이 그 땅에 남게 되었을 때 그곳에선 노동자의 노동자에 대한 투쟁이 발생하리라.
(『현대시세계』, 1989년 겨울호)

*대상 시집
─백무산, 『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1988.

4 thoughts on “깃발되어 오르리라 ─ 백무산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1. 읽다가 빨간펜 찾아서 모니터에 대고 밑줄 그을 뻔 했어요.^^
    이제껏 시평은 감성의 신경줄기를 다 일깨워서 따라가며 읽곤했는데…
    어느 새 눈에 힘주고는 머리를 일깨워 따라가고 있었어요.
    사람을 시로 바꿔 놓으시더니,
    사진을 소설로 바꿔 놓으시더니,
    이번에는 시를 논설문으로 바꿔놓으셨어요. 감동 백배 입니다.

    어릴 때 소름 돋으며 읽었던 김남주, 박노해님들의 시를 떠올리면서 읽었어요.

    1. 오래 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꺼내 보면서 이런 글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했어요. 가끔 실천적이던 시인들이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면서 배신의 상처를 남길 때가 있었는데 백무산 시인은 지금도 여전히 꿋꿋이 제 길을 가고 있어서 존경스러워요.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은 아닌 듯.

  2. 백무산의 시가 꿈꾸는 세상… 공감 또 공감합니다.
    그러면서 동원님의 독백에 저 역시 고개를 숙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시 한 편에서 우러나는 감동으로 세상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변하리라… 그것으로 백무산의 시는 성공입니다.
    글 한 줄에서 가슴이 따스해지고, 마음이 녹는다면 비록 이 시대에 칼날이
    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고향으로 다시 가고싶다는 시인의 마음이 오늘 가슴을 울립니다.’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땅으로 가는 거야, 갈 수 있고 말고…

    1. 이 시집을 내고 백무산 시인이 이산문학상이란 상을 받았어요.
      노동 시인 가운데선 제가 제일 좋아합니다. 끝까지 자신이 서 있던 노동의 자리를 지키면서 시를 쓰고 있는 것 같거든요. 쉽지 않은 일 같아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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