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세상으로 가는 소통로 ─ 심재상 시집 『넌 도돌이표다』

시집 표지

1
언젠가 <서편제>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관중의 동원수로 기록을 깬 영화였으며, 때문에 누구나 그 제목을 말하면 “아, 그 영화”하고 기억해 낼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영화였다. 나도 극장 앞에 줄을 선 기다란 사람들의 대열에 편승하여 그 영화를 보았다. 판소리를 주제로 한 그 영화의 메시지를 몇마디 말로 추려내자면 소리의 이상을 꿈꾸는 자가 고집스럽게 걸어간 길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과 고집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현실과 조화롭게 타협하지 못한다.
그 때문이었을까. 영화를 같이 보았던 친구는 극장 문을 나서며 시큰둥한 말투로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지만, 근데 저런 영화가 나같이 넥타이메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라고 내게 반문했다. 그의 말로부터 나는 그에게 있어 그 영화가 재미있고 감동적이면서도 그와는 너무 먼 남의 얘기로 보인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게 있어 그의 말은 문학이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매우 현실적 공간의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거냐는 반문으로 환치되어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러한 괴로움은 나로 하여금 문학 속으로 들어가 그것이 가진 고유의 미적 가치를 향유하기보다, 문학과 현실의 경계에 서서, 그 경계의 간극과 서로의 간섭에 더 많은 시선을 주게끔 만들었다.
그것은 왜 예술은 그렇게 현실과 거리가 멀어보이는 것일까? 실제로 예술은 그렇게 현실과 거리가 먼 것일까? 현실과 예술 사이의 소통로는 없는 것일까? 그 둘은 그렇게 이질적으로 격리된 유다른 공간이어서 서로 무심한 시선으로 각자의 세계를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등등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기도 했다.
심재상 시집 『넌 도돌이표다』를 읽어가는 나는 또 다시 그 여정 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2
나는 먼저 우리들이 일상을 묻고 있는 현실의 풍경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심재상의 이번 시집에서 그 현실은 경계를 명확하게 긋고 재단하고 있을 뿐더러 또 그런 분명한 경계를 추구하고 있다. 어느 날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로 짐작되는 시인의 어느 한 순간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런 현실을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다. 그날 의사는 “세면대 위에 허리를 굽힌 채” “허여멀건 손에 거듭 비누칠을 하면서 쫀쫀하게 씻어내면서 심드렁하게” 이렇게 말한다. “별 이상 없습니다 단지 저혈압인데다가 손발이 너무 차니까 담배를 줄이시는 대신 반주 삼아 술을 조금씩” 마셔보세요라고. 즉 의사의 현실 속에서 시인은 저혈압과 수족 냉증으로 명확하게 선이 그어지며, 그 경계 속에서 시인이 해야 할 일은 식사 때의 반주로 다시 또 명확하게 제한된다. 그 반주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의사에겐 그렇듯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 시시한 병력”의 경계가 분명하게 그어져 있을 뿐이며, 의사는 그 경계를 넘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사가 병력이란 지표로 그어놓은 현실적 경계는 시인을 그 안쪽으로 묶어두지 못한다.

정말 좋겠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 시시한 병력 너머로 멀쩡한 두 눈이 마음의 길섶 자꾸만 어지럽히니 좋겠지(하략)
─「나의 아라비안 나이트1」 부분

한잔의 반주에 얹힌 시인의 시선은 의사가 제한한 현실적 방향으로부터 빗나가 그 병력의 너머 “마음의 길섶”으로 향하며 그곳을 어지럽힌다.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자리를 옮겨보면 그러한 대비는 더더욱 명확한 구도로 나타난다. 시인이 처음에 보여주는 것은 장례용품의 가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명세표이다. 그것만큼 죽음의 경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현실이 더 있을 수 있을까. 그 분명한 경계의 현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느낌은 건조함이다. 그렇게 장례용품의 가격으로 재단된 죽음의 현실엔 인간의 감정이 스며들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 물론 그것이 우리들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임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다. 그러나 시인이 포착한 장례식장의 풍경은 그와는 확연하게 분위기를 달리한다.

오가는 발길에 짓뭉개진 국화꽃잎들
푸른 진물로 뒤덮인 강파른 계단 입구에
쪼그리고 앉은 한 움큼 아침 햇살,
안주도 없이 연신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마시는
중년 사내, 떨리는 손 후들대는 무릎 곁에서
옹알거리며 동화책을 읽고 있는 어린 소녀,
그 윤기 자르르한 검은 머리채 위로
─「국화 향기는 날아오르고」 부분

장례용품의 명세표와 장례식장의 이 풍경은 같은 공간의 경계 속에 놓여있지만 그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전자에서 죽음이 죽음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드는 반면, 시인이 그의 언어로 옮겨놓은 장례식장 풍경 속에선 죽음보다 오히려 삶의 느낌이 더욱 강하다. 그래서 삶이 죽음을 간섭하고 있고, 그 둘이 갈라서 있다기보다 서로 연계되어 열려있다는 느낌으로 와닿는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들이 말하는 일상이나 현실이란 것이 원래 시적 세계와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격리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어떤 공식적인 선입견의 꼬리표를 붙여 제한을 하고 그 선을 넘어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략)그러니까 이 길 언저리에만 공식적으로 열 개나 되는 자연 호수가 있는 셈인데, 하나같이 우리가 거덜을 내놓았다, 뭐 이런 얘기요? 아니 근데, ‘공식적으로’는 이라니?(하략)
─「보이지 않는 호수들」 부분

혹시 일상이란 것이 그 공식적인 경계에 갇혀있는 삶은 아닐까. 그리고 그 경계 속에 갇히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어서 여태 우리가 끝장을 내놓을 수 없었던 호수들”을 “볼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 아닐까.
시인에게 있어 경계가 분명하게 그어진 일상은 방향도 일정하게 한쪽으로 굳어져 있다.

당신, 이 텅 빈 비가역반응의 즐거움 잘도 참아내는 근엄한 당신(하략)
─「개꿈」 부분

비가역반응은 반응이 한쪽으로만 일어나는 경우를 뜻한다. ‘온천수’를 찾아내려는 사람들이 남긴 땅의 상처들, 즉 “뚫을 줄만 알았지 닫는 걸 잊어버린 크고 작은 구멍들”도 그런 현실의 한 예이다. 시인은 그 구멍이 “들판에 계곡에 산기슭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현실을 ‘졸지에’ 그 구멍 밖으로 “끌려나와 뺑뺑이를 돌고 돌다 맥없이 방면된” 지하수의 목소리를 빌어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아포칼립스 나우」 즉, 지옥의 묵시록이란 시의 제목은 시인의 생각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는가를 쉽게 점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시 속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현실과 그것의 경계가 갖는 완고함에 대해 나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으로부터 나의 현실을 보기보다 시인의 현실을 들여다보며 제3자적인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그가 말하는 현실적 경계의 완고함과 그 경계가 가두고 있는 우리의 일상이 내게 직접적으로 체감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당황한 것은 심재상의 시가 나의 귓가를 속삭이며 나의 일상으로 파고든 다음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나는 지하철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철은 나에게 편리한 교통 수단의 대명사였고, 지하철 회사에서 선전하고 있는대로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켜주는 효율적인 매체였다. 그런데 시인의 지하철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 지하철은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당신이 곧 시간입니다. 당신은 오로지 사용해야 할 시간, 소모하고 탕진해야 할 자신의 시간일 뿐입니다. 오늘도 꽉 찬 일정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당신의 삶은 나의 것입니다. 이제 나 말고는 당신의 소중한 약속 시간을 보장해줄 수 있는 길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파른 지하계단들, 구간과 구간을 균질하게 분절/접속시켜줄 길고 구불구불한 연결통로들은 모두가 당신이 하루치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보행거리를 제공해줄 수 있도록 주도면밀하게 설계된 것들입니다. 나를 믿으십시오. 시작이 절반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뚜욱,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전선 밖으로 따악 한 발짝만 물러서 주십시오.
─「모래시계」 부분

나는 그 순간 갑자기 답답함을 느꼈다. 편리성으로 잘 재단되어 있던 지하철의 현실적 경계를 시인이 깨끗이 지워버리고 그곳에 새로운 목소리를 입혔을 때 지하철의 일상은 그 전과는 분위기를 완전히 달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갇혀있었다.

3
현실에 그어진 분명한 경계들은 대체로 우리들에게 편안하고 행복한 일상을 안겨주지만 말을 뒤집으면 우리들을 그런 일상 속에 가둔다. 그 일상 속에서 우리는 “반성을 모르는 관습”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아니, 그에서 더 나아가 ‘합리’라는 이름으로 “7월의 소나기구름을 눅눅한 자기앞 수표로 바”꾸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우리가 얻어낸 그 “반짝이는 새 이름”과 “송편 같은 새 얼굴,” “폭포수 같은 불빛 아래”서 우리가 누리는 화려한 일상은 실상은 우리의 ‘혀’를 “잘라내어” 건네주고 얻어낸 것들이다. 그 속에 갇혀있을 때, 시는, 또 폭넓게 예술은 현실과 너무 먼 다른 나라의 얘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현실이 그렇게 이질적 공간으로 고립되어 있을 때, 시인이 그 현실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현실의 닫힌 경계가 갖는 답답함과 상투성의 권태를 드러내고, 일상 자체에 시를 심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시가 일상과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제시하면서 사실은 시가 일상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하나란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시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완결된 성채가 아니라 시와 현실을 잇는 소통로이다. 우리는 시라는 소통로를 통하여 비로소 일상으로 들어가고 나갈 수 있다. 일반적 의미의 일상이 우리를 가두고 있는데 반하여 시의 소통로를 통하여 들어가고 나가는 일상은 우리를 가두지 않는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장 손쉬운 예의 하나는 일상 속으로 잠입하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그것은 대상에 대한 제3자적 시각을 버리고 그와 하나되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제3자적 시각에 갇혀있던 우리의 감각을 방면하여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이 내 머리를 눈 위에 굴린다
사람들이 내 몸뚱이를 눈 위에 굴린다
─「눈사람」 부분

이는 아주 단순한 방법이지만 눈사람을 만든다는 현실적 경계 속에선 맛볼 수 없는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눈사람 속으로 잠입하면 시는 우리의 눈으로 재단된 언어가 아니라 눈사람과 하나되어 체감하는 몸의 언어가 된다. 그리하여 눈사람의 일상이 시가 된다.
또 하나의 방법은 일상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던 시적 세계를 일상 속으로 수렴시켜 보는 것이다. 나는 시인이 찾은 봄의 동해 바닷가에서 그 예를 접할 수 있었다. 과연 봄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시인은 “댐에 가로막혀 파랗게 질려 있던 강물”이 그 “막힌 삶을 뽑아 올”리는 곳에서 “시퍼런 바늘방석을 펼치며 밀고 올라가”는 ‘잔솔들’의 생명을 본다. 대체적으로 우리의 시들은 봄의 경이로움을 그러한 자연 속에서 찾는데 예외가 없다. 그러나 푸른 “안인 바다”에서 시인의 눈에 들어온 봄은 “대체 어디서 나타났을까”하는 궁금함을 불러 일으키며, “몸 가벼운 할미새처럼/폴짝폴짝 바위 사이를 건너뛰던 아이들, 그 알몸의 외침들”로 수렴된다. 다시 말하여 봄을 알려주는 ‘잔솔들’의 경이로움이 자연에 유폐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우내 인적이 없었던 바닷가를 찾은 아이들의 일상적 풍경 속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풍경에서 시인이 꾸는 꿈이 “알몸의 외침”임을 알게 된다. 즉 그에게 봄은 새로 솟은 푸른 새싹을 보는 것으로 체감되는 것이 아니라 그 봄을 아예 우리의 몸으로 가져오는 것으로 체감이 된다. 시인이 본 아이들이 바로 그런 봄의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그 봄의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현장은 일상 자체를 없애고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계를 지워서 시와의 소통로를 뚫어줌으로써 일상 그 자체를 시로 뒤바꾼다.

4
물론 아직 그런 세상은 아니다. 시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아직은 이 몸 말이 아니고
아직은 이 세상 시가 아니지만
─「이윽고 나도 늙으면」 부분

이미 말했지만 그의 시는 사실은 완결된 시라기보다 시의 세상으로 가는 소통로이다. 아마도 시가 하나의 완결이었다면 그는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 쉽게 그 노고를 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어놓은 경계를 교묘하게 지우고 그 현실 속으로 소통로를 뚫는 것이 시인의 일이 될 때 그 일은 나이들면서 점점더 힘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의 인간이어서 나이의 무게는 대부분 우리들을 더 현실쪽으로 기울여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서 자신의 길을 가려는 열정은 식지 않고 있다.
이제 나는 시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적 경계의 완고함과 싸워보라는 충고와 함께 심재상이 마련한 소통로를 권해볼 수 있는 또다른 여지가 생겼다. 그 소통로에 서 보는 행운의 사람들에겐 시가 일상과 격리된 공간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일상 자체로 향하는 놀라운 발견의 순간이 열릴지도 모른다.
(『현대시』, 2004년 3월호)

*** 대상 시집
심재상, 『넌 도돌이표다』, 문학과지성사, 2003

8 thoughts on “시의 세상으로 가는 소통로 ─ 심재상 시집 『넌 도돌이표다』

  1. 우연히 도돌이표 도레미송 노래를 듣다가
    7월의 첫 날…
    좋은 글을 썼답니다 (그냥 제가 생각하기에요..ㅎ)
    어쩜 넉두리 같고 짜맞추긴 했지만..깊은 사유가 허락되는 환경이 아니라
    (늦둥이 꼬마 시험 공부 봐주느라요..ㅋㅋ글을 쓰며…핑게되면 안되나요?)
    글을 쓰는 내내 어려워서 소통하지 못한 이 시인의 글이 생각나고
    (아니..제목만요~~~)
    동원님께 감사 드리고 싶었어요…

    1. 고맙습니다.
      저는 제목만 읽어도 반은 읽은 것으로 쳐요. 시작이 반이라는 우리 속담을 앞에 내 세워서요. 그래서 제목 두번 읽는 것으로 다 읽은 것으로 하는 경우도 있어요. 시작 두 번 했으니 다 읽은 것으로 해 버리죠. ㅋ
      힘 내세요. 그래야 님이 쓰신 글도 힘을 낼 것 같아요. ^^

  2. 가역반응과 비가역반응.
    화학을 배울때 참 어렵게만 느껴졌습니다.
    그 반응이 사람들 사이에도 있다는 걸 점점 느껴가고 있습니다.

  3. 김동원님께서 쓰신 글입니까.. ^^;
    그냥 스크롤로 내려보려다가, 문득 호기심이 생겨 꼼꼼하게 읽어보았습니다.

    굉장히 재밌군요. 시는 세상과의 소통로이다..

    사실 어렸을 적 시를 지을 땐, 무조건 어려운 말만 늘어놓으면
    되는 줄 알았거나 혹은 아주 쉬운 말을 운에 맞춰놓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죠.

    어느샌가 시와는 멀어지고 시집을 봐도 ‘음…’ 외에는 감흥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살다보니 좌뇌만 쓰고 우뇌를 안썼던 것 같아요.
    똑같은 시라도 무릇 머리로 장면을 상상하고 자신의 처지와 접목을 시켜서
    보게되면 모르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이상 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되더라구요.

    물론 일부러 그러지 않아도 자신에게 너무 맞아떨어지는 예술작품들이 있다면
    마치 아무 이유없듯 푸욱- 빠져버리곤 하지요. ^^;

    간만에 정말 행복했습니다~~

  4. 오래 전, ‘문학’이라는 단어는 ‘꿈’처럼 아득하고 먼 거리에 존재했었습니다.
    일상의 먼지를 털어내듯 요즘도 가끔 타닥 타닥 자판을 두들기다 보면 아득히 멀게 느껴졌던 오래 전의 길이 보이는 듯도 합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시의 언어들… 그것이 시인의 독자적인 고립된 ‘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과 어울리는 ‘소통로’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그런데 고백하면 시는 늘 어렵다,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에요.

    <넌 도돌이 표다>, 시집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은 삶의 되풀이, 반복되는 삶의 뒷모습들이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을 가져봅니다. 제대로 소화도 못한채 넋두리만 남기고 가네요… 죄송합니다.

    1. 저도 시를 읽다가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경우가 많아요.
      이게 우리 나라 말인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이해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재미난 부분만 골라서 즐기는 편이예요.

      “조심하세요
      박수가 마려운 심벌즈가 밤낮없이 손뼉을 찾아다니고 있으니깐요.”

      이런 싯구절은 얼마나 경쾌하고 재미나는 지요. 김민정의 시인데 사실 요 부분만 보면 재미난데 전체를 보면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머리가 어지러워져요.

      재미난 시들을 좀 찾아봐야 겠어요.

      그리고 넋두리 나누는 게 바로 블로그의 재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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