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의 어둠 속에서

Photo by Kim Dong Won
2004년 12월 17일 아침 6시 57분 전남 순천만에서


핸드폰의 뚜껑을 여니 파란 액정 속에서 항상 나에게 시간을 알려주던 숫자들이 지금이 아침 여섯 시임을 선명하게 일러주고 있다. 그러나 여섯 시가 가져다줌직한 아침의 밝음이나 푸른 새벽 기운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나는 어제 밤 10시 50분에 서울 용산을 출발한 열차에 몸을 싣고 다섯 시간여를 잔잔하게 흔들리며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으며, 그 밤여행의 끝에서 4시 30분경에 순천역에 내렸다. 해뜨는 시간도 확인하지 않고 택시에 오른 나는 무작정 ‘순천만’을 행선지로 택시 기사에게 일러주었다. 이미 어깨에 둘러멘 삼각대로 미루어 그 택시 기사의 동료 중 한 사람은 나의 행선지를 순천만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무선 통선기를 붙잡고 그 짐작의 신통함에 놀라며 동료를 점쟁이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대화를 주고 받고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래도 바다로 나가면 곧 날이 밝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순천만으로 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택시가 가로등과 안내판이 그럴 듯하게 마련된 어느 곳을 지나쳐 더욱 깊숙이 순천만의 폐부인 듯한 곳으로 들어섰을 때 그곳에선 가면 갈수록 어둠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내 고향이라면 아마도 그 어둠은 어둠이라고 해도 낯이 익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에서의 어둠은 결코 익숙하질 않다. 때문에 낯선 곳에선 세상이 어두우면 그 속으로 선듯 발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다. 그 낯설음은 이방인의 마음 속에선 곧바로 두려움으로 치환이 된다. 그것은 고향의 어둠 속에선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었다. 고향에 내려갔을 때면 아무리 어둠이 짙게 깔려도 나는 어둠 속에서도 내 고향 마을을 익숙하게 더듬어 갈 수 있었다.
이쪽으로는 가내골이고, 저쪽으로는 마차이며, 어느 만큼 발걸음을 옮기면 샛길이 어디로 나를 이끌 것인지, 어둠 속에서도 한치의 어김없이 짚어낼 수 있다. 때문에 고향의 어둠은 종종 나에게 아늑함이 되곤 했다. 고향 뿐만이 아니라 그 이름을 친숙하게 들어온 곳들, 그러니까 고향의 주변에서 항상 그 이름을 들어왔던 제천, 주천, 원주, 단양, 신림은 가본 적이 없어도 마치 가본 것 같은 느낌이었고, 그래서 그곳은 밤에 어둠 속에서 찾아가도 그다지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서 있는 이곳 순천은 그 이름마저도 내게는 익숙치 않은 도시이다. 도시의 한복판이라면, 아마도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눈을 부라리며 어둠이 까만 표정으로 서서 밤을 보낼만한 자리에 매우 인색했을 것이 뻔하고, 그런 불빛으로는 그 어느 도시에도 화려함에서 뒤지지 않을 서울에서 살고 있는 관계로, 나는 처음 찾은 순천의 밤이었다고 해도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를 벗어나 순천만으로 들어서는 순간 얘기가 달라졌다. 나는 갑자기 산속에서 길을 잃은 조선시대의 어느 선비가 그 칠흑의 어둠 속에서 겪었음직한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택시 기사에게 차를 돌려 좀 전에 가로등이 있었던 곳으로 다시 나가자고 했고, 그곳에서 일단 차를 내렸다.
택시 기사는 나를 내려 주면서도 걱정을 했다. 다시 역으로 나가 기다렸다가 날이 밝으면 들어오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순천에 사는 그가 그렇게 걱정을 했으니, 그 걱정을 뿌리치고 부득부득 고집을 부려 내린 것은 내가 크게 판단을 잘못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순천역으로 나가는 것은 그렇다고 생각했고, 결국은 어딘지도 모르는 순천만의 어둠 속으로 버려진 듯 서게 되었다. 그나마 사방 20m 정도를 빛의 우산으로 보호하며 밀려든 어둠의 밀물을 막아주고 있는 가로등이 하나 있는게 다행이었다. 나는 그 가로등의 불빛에 기대어 그곳에서 아침까지 기다려볼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시간이 한 시간을 지나고,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시간이 1시간 30분을 넘기고 있었지만 주변의 어둠은 요지부동이다. 어둠은 단단히 가부좌를 튼채 몸을 일으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멀리 내가 택시를 타고 이곳으로 들어오던 방향으로 불빛들이 보이지만 다시 그곳으로 가기에는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어둠의 심층이 너무 깊다. 그곳으로 가다가 그 짙은 어둠 속에서 실족을 하면 영영 그 어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냉기가 파고드는 바닷가의 한적한 마을 공터에서 덜덜 떨며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때 어둠이 집어삼킨 길의 저쪽 끝에서 불빛 하나가 반짝인다. 점점 불빛이 강해지며 계속 흔들린다. 움직임으로 보아선 아마도 이곳으로 오는 것만 같다.
오, 그 반가움이란! 아마도 빛이 구원의 상징이 된 것은 바로 이런 어둠의 늪 속에 포박된 자가 느낀 감정으로부터 나왔으리라.
아직 요원하기만 한듯한 아침을 저 멀리 둔채, 나는 그 작은 불꽃이 내게 던진 구원의 상징을 오늘은 어둠 속에서 몸으로 느껴보고 있다. 어둠도 친숙함이 아니라 두려울 때가 있으며, 빛도 도시의 그 흔한 불빛들 속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빛날 때는 몰랐으나 어둠이 짙을 때는 구원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빛은 계속 같은 자리에서 깜빡이고 사그라들고 하고 있다.
아침이 밝으면 한번 가서 확인해 보리라. 확인해 보면 좀 허무하기는 하겠지. 분명 어느 인가에서 밝힌 불빛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허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 밝힌 불빛 하나로 남에게 구원이 될 수도 있다면 우리 삶의 작은 것들이 때로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닐까. 순천만의 어둠은 도시에서 온 나에게 빛 하나도 귀한 것이라며 여전히 나를 짙게 둘러싸고 있다. 그렇구나. 때로 빛도 귀할 때가 있구나. 아침이 오면 그 목마른 빛을 마음껏 호흡하리라.
(2004년 12월 17일 아침 6시.
12월이었지만 남쪽은 그래도 견딜만했다.
대대포구를 왔다갔다 하다가
가로등 밑에 쭈구리고 앉아 써두었던 글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4년 12월 17일 전남 순천만 대대포구에서.
사진을 찍은 시간은 4시 14분으로 되어 있다.
아무래도 4시가 안되어 순천역에 내렸나 보다.

8 thoughts on “순천만의 어둠 속에서

  1.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순천에서 인물 자랑하지 말며,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거라.
    제가 여수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할 때 들었던 말입니다.
    어둠이 외지인에게 순천의 인물을 감춰 두려고 했나 보네요.

    기사식당에서 백반은 드시고 오셨나요?

    1. 사진찍으러 가면 사진찍는데 바빠서 거의 하루종일 쫄쫄 굶고 다녀요. 이 날은 10시쯤 아침만 먹고 하루 종일 건너뛰었던 기억이예요.
      지금은 장비가 얼마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버리는 바람에(넉넉한 저장 카드 땜시) 이것저것 정신없이 담아 오는 것 같아요. 가끔 카메라인지 비디오 카메라인지 헷갈리기도 하니까요.

    2. 디카의 좋은 점이 총을 쏘고 바로 과녁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데
      필름만큼 기다림과 설레임이 없어져 버린 것은 아쉬운 점입니다.

    3. 제가 아는 사람 하나는 그 필름의 질감을 포기하지 못해 여전히 필름으로 사진 활동을 하고 있지요. 흔히 사진하는 사람들도 필름과 디지털은 카메라가 바뀐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진 분야라고 말을 하고 있구요.

  2. 정박해 있는 배 한 척, 가로등 불빛, 그 옆의 의자들…
    그곳에 있던 사람과는 다르게 보는 사람은 낭만적으로 느껴지네요…
    어둠 저편의밝음을 사진 속에 옮겨 놓은듯, 동원님의 훌륭한 사진 솜씨가 돋보입니다.

    홀로 어딘가에 뚝 떨어졌을 때, 그것이 어둠 한가운데라면 두려움이 몰려오리라.
    그때 어디선가 비쳐 오는 빛 한줄기는 구원의 메시지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순천, 갑자기 순천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이 올라옵니다.

    1. 요즘 같았으면 사실 여섯 시만 되도 훤한데다 춥지를 않으니 별 두려움 없이 견뎠을 거 같아요. 그때는 12월이라 추운데다가 날은 왜 그렇게 더디 밝는지요. 그래도 좋긴 좋았어요.

      순천은 가볼만하지요. 두 번 갔는데 갈 때마다 좋았다는…

  3. 순천은 전국에서 소음이 젤 작은 도시라 합니다.
    익숙지 않은 조용한 도시에…..
    12월의 시린 계절에…….
    어두운 새벽에………
    동원님의 첫 발걸음에 어떠했는지……
    조금은 알 듯 하네요.

    동원님에게 익숙하지 않던 순천만의 풍경~~~
    저에겐 늘 포근…ㅎ
    남쪽나라는 비가 겁나게 오네요.

    1. 아마도 순천이 고향이었다면
      강원도 설악산에 갔을 때 두려움을 느꼈을 듯.
      강원도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산은 어두워져도 그렇게 두려움을 못느껴요.
      새벽의 깊은 어둠은 두려웠지만 낮엔 아주 좋았어요.

      서울도 비가 엄청나게 오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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