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처음으로 팔당의 예봉산에 올라 능선을 따라 걷다가
아래쪽으로 숲속을 깊이 파고들며
산의 허리춤으로 가고 있는 길을 하나 보았다.
걷기에 딱좋은 길로 보였다.
창가를 어른거리는 햇볕이 아주 좋았던 1월 11일 일요일,
퍼뜩 머리에 떠오른 그때의 숲길 생각에
나는 부랴부랴 카메라를 챙기고
바나나 몇 개를 가방 속에 집어넣은 뒤 집을 나섰다.
바로 조 길이다.
길을 따라가면 양수리에서 몇번 보았던
동국대 연습림의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이 되지 않을까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결국 길의 입구는 만나지 못했다.
아마 길의 입구를 만났다면 난 그때 하산길을 달리 했을 것이다.
입구를 찾지 못한 나는
이 길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내려와
덕소에서 하산길을 마감했다.
한번 가봤다고 이제 버스편은 훤하게 꿰차게 되었다.
버스 한 번 갈아타고 팔당대교를 넘어간 뒤,
덕소 바로 전역인 도심역에서 내렸다.
내가 간 길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은 아닌 듯하다.
올라가는 사람들은 뜸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은 잦다.
가다보니 마을의 논에서 사람들이 썰매를 타고 있다.
어릴 적 내 고향에서도 딱 한 번 겨울에 논에 물을 대
얼음판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다들 무지 좋아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물에 빠질 염려가 없기 때문이었다.
개울에도 얼음이 얼었지만 그곳에서 놀다보면 얼음이 꺼져
물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겨울에 물에 빠지면 이중으로 고역이었다.
일단 춥고, 그리고 엄마에게 혼나야 했다.
하지만 그 뒤로 다시는 겨울에 논에 물을 대는 일은 없었다.
봄이 왔을 때 논이 너무 질퍽대
농사짓는 일이 크게 어렵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때문이었다.
길가에 지어진 정자에선
겨울 찬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어느 집의 옥수수와 시레기가
이 계절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버스가 하도 띄엄띄엄 다녀서
재수좋게 시간맞으면 산자락까지 타고 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걸어가는 편이 낫다.
산자락에 다 도착하도록 버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마을을 가로질러 가면서 이집저집 구경하게 된다.
그 중 어느 집의 창가에서
온갖 농기구며 정원 가꾸는 손질 도구들이 늘어서 햇볕을 쪼이고 있다.
낫, 호미, 삽, 가지치기 가위 등 없는 것이 없어보인다.
날씨가 갑자기 가라앉아
겨울이란 것을 실감나게 해주고 있었지만
이 겨울에 나무들은 움츠린 듯 하면서도 벌써 봄을 준비하고 있다.
목련의 몽우리가 여기저기 잡혀 있었다.
나무들이 그냥 봄을 맞는 것은 아닌 듯하다.
계곡이 얼어붙었다.
물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 등에 올라타고
하얗고 맑은 수염을 턱밑에서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는 계절이 겨울이다.
계곡의 물은 내려가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잠시 등말타기 놀이를 하며 논다.
층층으로 등을 탔다가
햇볕과의 가위바위보에서 지면 일거에 무너진다.
오늘은 아무래도 가위바위보에서 계속 얼음이 이길 것 같았다.
처음엔 이 길이 전에 산을 내려올 때 걸었던 길이란 걸 몰랐다.
어둑어둑해진 밤에 내려오면서 여기와 저기를 구분하기 힘들었던 데다가
버스를 탔는데 무척이나 오래도록 산을 빠져나오는 느낌이었다.
오늘 걸어보니 그때 버스를 탔던 그 거리는
걸어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모를 때는 짧은 거리도 엄청나게 늘어나는 구나.
오늘은 산에 오르지 않을 생각이다.
그냥 여유있게 산길을 따라 걷고 싶다.
이 길을 따라가면 새재고개가 나온다.
어찌하여 새재고개라 부르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문경새재만큼 험악한 고개는 아니다.
하지만 옛날엔 그처럼 험악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번을 거쳐간 길이지만
올라가면서 내가 길에 남겨놓은 추억과 만난다.
밤에 내려오다 한참을 쉬었던 바위이다.
오늘은 밝은 햇살이 평평한 바위 위를 모두 차지하고 앉아 쉬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새재고개를 넘은 뒤 길을 잘못들었다.
두 갈래 길에서 아래쪽으로 난 길로 들어선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난 그때의 길을 찾지 못하고 시우리 방향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동네 이름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길에 사람이 뜸하다.
대신 언제 내린 눈인지 알 수 없으나
길가에 잔설이 히끗거리는 산길을 호젓하게 걷게 되었다.
높은 키의 낙엽송 사이로 흐르는 길은
이제 마을로 내려가겠지만
낙엽송이 울창한 나무 사이로
딱 산길만큼만 보여주고 있는
저녁 햇살 가득한 앞산 때문에
이 길이 저만치 길의 끝에서
마치 용처럼 꼬리를 흔들며
산으로 곧장 날아오를 듯한 느낌이었다.
이것도 나중에 안 것인데 저 산은 갑산의 한 자락인 것 같다.
내가 올라보지 못한 산이다.
산길을 거의 다 내려오자 한 포도밭 옆에서
수레하나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
수레는 물구나무 서기를 좋아한다.
수레는 물구나무를 설 때마다 제 몸에 실은 것을 모두 털어낸다.
아예 물구나무를 서서 저러고 있는 것을 보니
겨우내내 지난 계절의 노고를 모두 털어내고 싶었나 보다.
마을로 내려오니
길을 따라 함께 흐르고 있는 논이 내 발길을 반겨준다.
처음 들어선 마을인데다가
한적하기 이를데 없어서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다.
이 마을은 오뉴월에는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어릴 적 기억을 제외하면
근래에 반딧불이를 본 것은 대관령에서밖에 없었다.
산넘어가면 덕소이니
밤늦게라도 고개넘어 한번 찾아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기억해 두었다.
개울건너 숲속에선
낮은 곳을 찾아내 산을 넘은 저녁 햇살이
나무들의 우듬지에 밝게 걸려있었다.
원래 가려고 했던 길은 알고보니
햇살이 넘어온 산의 저쪽에 있었다.
길가에 서 있는데
지나가던 자가용이 내 곁에서 멈춰 서더니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서울로 간다고 했더니
자신도 서울간다며 타라고 했다.
덕분에 편안하게 덕소까지 나올 수 있었다.
나와 보니 무지 먼 길이었다.
그 분 말씀이 차라리 오던 길을 거꾸로 걸어
새재고개로 다시 넘어가는 것이 빠르다고 했다.
길을 찾아갔다가 길은 못찾았지만 새로운 길을 찾았다.
중간에 몇 군데 봐둔 곳이 있다.
계절을 달리해 봄이나 가을에 찾으면 좋은 사진을 건질 수 있을 듯 보였다.
이번에 못찾은 길은 볕좋은 날
또 생각이 나를 바깥으로 불러내면 다시 찾아나서 보리라.
6 thoughts on “덕소에서 새재고개를 넘어 시우리까지 걷다”
썰매 타는 모습을 보니 논에서 외발 썰매를 타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겨울에 하던 유일한 놀이였는데
놀다가 허기지면 말린 옥수수를 구워 먹었더랬지요.
주둥이가 까맣게 변하곤 했었는데 그 맛이 이제는 느껴지질 않습니다.ㅜㅜ
저도 그 외발 썰매가 아직도 있는지 이날 궁금하더군요. 살펴봤지만 없더군요. 그거 잘타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정말 신기에 가깝게 잘 탔었죠. 못을 박은 기다란 막대기가 필수였지요.
정자의 저 시래기와 옥수수는 일종의 감동 이로군요.. 여러장의 사진과 글들을 보녀 한동안 겨울 정취를 즐기다 갑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산 속에서 추위와 싸우고 있는 실정 이긴 하지만 어쩐지 그 풍경만은 정겨워 보입니다.
한 계절이 고스란히 배면서 맛이 들 것 같습니다. 아마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겠지요. 맛도 겨울을 지나며 숙성된 맛은 무엇인가 다를 것 같은 느낌입니다.
계신 곳이 산과 가까운 곳인가 봅니다. 사진은 찍지 않았는데 푸룻푸릇한 싹이 올라는 밭도 있더군요.
지천명을 코 앞에 두고 가장 자신 있는 일 한 가지를 고르라면 ‘걷는 일’이라고 말하고싶어요. ‘걷기에 딱 좋은 길’ 그 길을 따라서 하염없이 걷고 싶네요. 조금 가파르고 길 사이사이 돌맹이가 깔려 있어도 제 튼튼한 다리는 문제 없거든요…
다시 가면 이번에는 길을 잃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올봄에는 아마도 자주 가지 않을까 싶어요. 남한산성은 좀 힘든 편인데 여긴 힘들지도 않고 여유있게 걸을 수 있는 길인 것 같아요. 진달래랑 갖가지 꽃도 많은 길이더라구요. 알고보니 지하철도 생겨서 교통도 무지 편하더라구요. 게다가 한강도 보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