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몸 이야기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2월 22일 서울 인사동 쌈지 갤러리의 Love Love전에서

1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공상과학 드라마 속에서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을 가리켜 물주머니라 부르고 있었다. 드라마 속 지구인 중 하나가 그것을 가리켜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가 덧붙여준 친절한 설명에 의하면 우리들 몸의 70~80%가 물이라는 것이었다. 구성 성분으로 보자면 우리의 몸은 물주머니인 셈이었다. 외계인들은 처음본 대상을 겉모습이 아니라 구성 성분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구성 성분으로 우리의 몸을 한눈에 훑어낼 수 있는 외계인의 눈엔 우리의 몸이 영락없는 물주머니이겠지만 시인들에게 우리의 몸은 시의 배태지 중 하나이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거리의, 아니 너무 가까워서 아예 거리의 간극을 갖지 못하는 우리 안의 배태지이다. 나는 이제 시인들로부터 바로 그 우리들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시를 읽는 것이 시적 대상으로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면 시적 대상이 바깥에 있을 때 그러한 대상들로의 여행은 우리 바깥으로의 여행이 된다. 그러나 그 대상이 바로 우리의 몸일 때, 그 몸으로의 여행은 우리 안으로의 여행이다. 그 몸의 시들을 따라 몸 속으로, 그러니까 바로 우리 안으로 여행을 떠나본다.

2
나는 일단 꿈이나 깨달음의 둥지가 된 몸을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아 본다. 내가 여기서 꿈의 둥지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소망하며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시인이 소망하는 꿈이 우리 몸속으로 흘러들어오고 있는 경우를 말함이다. “슬픔의 나무”란 것이 되고 싶어하는 한 시인의 소망에서 그러한 경우가 읽힌다. 이 경우 시인의 꿈은 나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한편으로 우리 몸과 혼재된다.

나, 슬픔의 나무이고 싶다.

밤이 오면 향낭인 몸을 열어
꿈이 사나운 짐승들
아무 맛이 되지 못한 낙과들
버림받아 난폭해지는 길들
둥글지 못해 낙심하는 돌부리들
깃들일 곳 찾지 못해 상심하는 영혼들
어루만져 재워주고
향기의 음부를 닫는 아침이면
그늘 아래 명상객들을 불러앉히는.
—양선희, 「슬픔의 나무」 전문

시 속에서 시인의 꿈인 슬픔의 나무는 나무라기보다는 차라리 여자의 몸에 가깝다. 실패하고 버림받고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삶이 잠시 쉴 수 있는 안식의 품이다. 그 품은 대개의 경우 여자의 품이다. 시인의 나무에 대한 꿈은 나무의 모습을 비는가 싶지만 실제로는 시인의 몸속으로 흘러들어 몸과 뒤섞이고 있다. 때문에 시의 느낌은 슬픔의 나무를 꿈꾸는 몸이 아니라 몸에 담긴 나무의 꿈이다.
몸은 종종 이렇게 꿈의 둥지로서 기능한다. 가령 시인은 복숭아를 살 때 “가게 아주머니”가 “성한 복숭아 담은 봉지에” 몇 개 더 담아준 ‘상한 복숭아’에서 세상을 뜨는 몸에서마저 꿈꿀 수 있는 향기로운 죽음을 보고, 그 꿈을 몸으로 옮겨가고 싶어한다. 또 “통증이 있는 신체 각 부위에/씨앗을 붙여놓으면/씨앗이 병 기운을 빨아들여/치료가” 된다는 ‘씨앗요법’을 말하는 자리에선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몸을 꿈꾼다.

먹다 보니 하, 신기하다.
성한 복숭아보다
상한 복숭아 맛이 더 좋고
덜 상한 복숭아보다
더 상한 복숭아한테서
더 진한 몸내가 난다.
육신이 썩어 넋이 풀리는 날
나도 네게 향기로 확, 가고 싶다.
—양선희, 「신비하다」 부분

두통이나 요통이 있을 때
카나리아 꽃씨를
손가락과 발가락에 붙여두면
진통 효과를 볼 수 있죠.
몸에서 떼어낸 씨앗은
제 색깔이 없어지고
거무튀튀해집니다.
빨아낸 병 기운으로
온몸을 채웠기 때문이죠.

상처인 네게
씨앗처럼 나도
몸을 붙이고 싶다.
—양선희, 「씨앗요법」 부분

몸은 그 자체가 깨달음의 자리이기도 하다. 삼보일배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서 우리는 그것을 접한다. 시인의 눈에 삼보일배는 “지극히 낮아지기 위하여/척추를 곧추세우는 것이”며, “두 손발 가지런히 모아/온몸을 낮추”고 “온 세상을 끌어안으며/수직하는 것이다.” “가는 것도 아니고/멈춰 서는 것도 아”닌 그 삼보일배에서 시인은 우리의 몸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정반대로 전환되고 있는 세상을 만난다.

길이 몸 속으로 들어온다
큰절 올리고 다시 세 걸음
몸 속으로 땅이 들어선다

그렇다
이 땅이 부처다
이 땅 이렇게 부처다
—이문재, 「이 땅이 부처다 —삼보일배(三步一拜」 부분

몸이 꿈과 깨달음의 둥지가 될 때 몸 속으로 흘러드는 그 꿈과 깨달음은 모두 몸과 반목하는 법이 없다. 몸은 꿈과 깨달음이 몸과 화해하는 자리가 된다.
하지만 몸과 세상의 관계로 눈을 돌리면 그 둘의 사이가 항상 원활한 것은 아니다. 몸은 그 속에서 세상과 반목할 때가 있다. 종종 그 반복과 갈등에서 몸은 세상의 기존 시각을 뒤집는 전환의 장소로 기능한다. 가령 여성의 몸을 예로 들자면 그 몸의 특징 중 하나로 손에 꼽을 수 있는 것이 월경이다. 그것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여성만의 생리 현상이다. 그 생리 현상은 여성 고유의 것이긴 하지만 아울러 그 특징은 여성을 여성으로 구별짓는 경계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 경계는 대상을 구별지어 주지만 동시에 그 구별이 억압적이고 부정적으로 작용할 경우 대상을 그 경계 안에 가두려고 하는 속성을 가진다. 즉 경계는 그 경계 안의 구별 대상을 억압하고 그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시인들은 항상 그 경계의 부정성을 넘어가려 한다. 경계를 넘어가려 한다는 말의 의미는 생리 현상의 부정적 인식 너머에서 또다른 의미를, 아니면 새로운 의미를 길어낸다는 뜻이다.

여자는 월경을 한다.
몸 안의 불경한 것들
경도를 타고 흘려보낸다.
밤낮 없는 나흘 내내
불경불경
변기통으로 빠지는 경(經).
월경하는 여자 몸은 신생(新生)이다.
—양선희, 「월경하는 여자」 부분

이렇게 하여 시인은 여성의 월경에서 생리 현상의 불편에 갇히질 않고 주기적으로 불경한 것을 내보내며 새롭게 태어나는 신생의 삶을 길어낸다. 이러한 양태는 더욱 적극적인 양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적극적 몸짓으로 무장을 한 시인은 감추고 숨겨두어야 할 것으로 교육 받았던 여성을 “여름 학기/여성학 종강된 뒤,//화장실 바닥에/거울 놓고/양다리 활짝 열”고는 들여다 보기에 이른다. 시인은 그 자리에서 “선분홍/꽃잎 한 점”을 본다.

이럴 수가!
오, 모르게 꽃이었다니

아랫배 깊숙이
구근 한 덩이
이렇게 숨겨져 있었구나

하얀 크리넥스
입입으로 피워낸 꽃잎처럼

철따라
點點이 피꽃 게우며,

울컥 불컥
목젖 헹구며,


물오른
한 줄기 꽃대였다네.
—진수미, 「Vaginal Flower」 부분

시인은 생리 현상으로 경계를 그어 여성을 그 경계 안으로 가둔 세상을 넘어가 “물오른/한 줄기 꽃대”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얻어낸다.
꿈의 둥지나 깨달음의 매개체가 될 때는 물론이고 새로운 전환적 시각을 구축하는 모체가 될 때도 몸은 부정적 대상이 아니다. 몸은 세상의 기존 시각과는 갈등하지만 그 갈등을 우리의 몸에 대한 새로운 긍정으로 넘어선다. 그러나 몸과의 관계가 항상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몸 자체는 곳곳에 부정적 요소들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몸의 각질은 “각질 제거용 돌”이나 “쇠를 마모시”킬 정도의 강력함을 보인다. 시인의 눈에 그것은 딱딱해진 몸이며, 그 딱딱해진 몸으론 생을 안아도 몸이 열리질 않는다. 시인은 그런 딱딱해진 몸이 ‘무섭다’고 말한다. 아울러 우리의 몸은 종종 회한의 자리가 되기 일쑤이며, 그 회환의 뿌리마저 우리의 안에 두고 있을 때가 많다.

(전략)… 生을 안아도 내 몸은 열리지 않아 비명만 나온다. 딱딱해진 혀는 더이상 生의 감미 알 수 없고, 딱딱해진 손은 生을 어루만질 수 없고, 딱딱해진 귀는 生의 음향 들을 수 없고, 딱딱해진 코는 生의 체취에 들뜰 수 없다. 생살을 파고드는 각질은, 무섭다. 내게 칼을 들게 한다.
—양선희, 「각질은 무섭다」 부분

(전략)… 내 몸은 마치 살려고 불을 토하는 활화산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내 속에서 올라온 火는 火山을 이루고 있었고, 그 주변 생물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내 속에 火가 저리 많았는데 나는 왜 너 하나 녹여 내 삶을 만들지 못하고, 나는 왜 나를 녹여 너 깃들일 집 하나 꾸미지 못했는가. 火 속으로 뛰어들어 火魔가 되고 싶은 나를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은 아직 토하지 못한 내 속의 너, 火根이었다.
—양선희, 「화산을 토하다」 부분

꿈이나 깨달음의 둥지일 때 열려있던 우리의 몸은 이제 각질과 분노의 몸에 이르자 그와 반대로 안으로 굳게 닫히고 만다. 한 시인은 그 닫힌 몸을 넓게 일반화하여 “당신 속에는 또 하나의 당신이 들어 있”으며, “당신 속의 당신은 당신의 몸을 안으로 단단히 당겨 잡고 있”다고 말한다. 또 시인은 “그래서 당신의 손톱은 안쪽으로 동그랗게 말려들고, 당신의 귓바퀴 또한 당신의 몸속으로 소용돌이치며 빨려들고 있”다고 덧붙인다.

당신의 얼굴은 당신 속의 당신이 당신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모습 그대로 굳어져 있습니다 가끔 그 얼굴이 당신 밖의 내 얼굴로 기울어지기도 하고, 당신의 두 눈동자 속에서 나를 내다보는 당신 속의 당신을 내가 느끼기도 하지만 당신 속의 당신이 당신을 당겨 잡은 그 손을 놓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팽팽히 당겨져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그 긴장을 견디느라 이제 주름이 깊습니다
—김혜순, 「얼굴」 부분

시인의 전언에 따르면 그렇게 내 안에서 나를 잡아당겨 가두고 있는 것이 우리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안에 나를 가두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그 운명의 삶과 몸은 내 안의 나로부터 도망치려고 해보았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음을 보여준 한 시인에게서 다시 확인이 된다.

삼십 삼 년 동안 두번째로 나는
나로부터 도망갈 결심을 한다.
우선 머리통을 떼내어
선반 위에 올려 놓는다.
두 팔과 두 발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몸통을 떼내 의자에 앉힌다.
오직 삐걱거리는 무릎만으로 살며시 빠져 나와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오래 달리고 달려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
가만히 쉬고 싶을 때,
저 앞에서 누군가가 걸어간다.
그에게 달려가 동정을 구한다.
그 품에서 잠시만 쉬게 해달라고,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품에서
가볍게, 풍선에서 공기빠지듯
가볍게 죽게 해달라고.
그는 못 들은 체하며 걷는다.
나는 또다시 그에게 동정을 구걸하고
이윽고 마지못해, 귀찮다는 듯
그가 나를 뒤돌아볼 때

그것은……
짓뭉개져 버린 나의 얼굴.
—최승자, 「삼십 삼 년 동안 두번째로」 전문

내 속에는 나와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또다른 내가 있다. 그 또다른 나는 어떤 경우엔 내가 키운 짐승의 모습을 하기도 한다. 두려움이란 이름의 짐승이다. 그 짐승은 내 몸을 숙주로 삼아 그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어떤 상황이 닥치면 갑자기 내 앞으로 튀어나오곤 한다.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은 “어둠 속에서”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그런 경우의 예이다. 그런 경우 누구나 두려움에 사로 잡힌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그런 상황에선 그 두려움이 바깥에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또 많은 경우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우리 속의 우리에게 쫓긴다.

(전략)… 발은 힘센 어둠을 밀고 걸어가기가 어려웠다. 거리에서는 한 블록을 지날 때마다 매복되어 있는 짐승을 만났다. 짐승들은 어디선가 갑자기 뛰쳐나와 나를 뛰어넘으며 으르렁거렸다. 나는 가끔씩 뛰었다.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나를 앞질렀다. 나는 뛰었다. 헉헉대며 가까스로 집에 당도해 나동그라졌다. 그때 쓰러진 채 나는 본 적도 없는 거대한 짐승 하나가 내 안에서 뛰쳐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짐승은 지붕을 넘어 사라졌다. 지붕의 기왓장들 하나하나가 차례로 떨어져내렸다.
—이수명, 「또 하나의 탈출」 부분

내 몸 속의 또다른 내가 있으며, 그 또다른 나는 내 몸을 안식의 둥지로 삼지 못하고 오히려 내 몸 속에 갇힌 수인의 신세가 되거나 아니면 내 몸을 두려움 속에 가두어 버린다. 몸이 감옥이 되어 나를 가두어버리는 이러한 상황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두려움의 경우라면 그 원인이 내게 있지만 답이 외부에 있을 때도 많다. 그 몸이 여성의 몸이라면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각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는 사회나 관습을 답으로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몸이 우리 모두의 일반적인 몸이라면 답은 이제 우리들이 한시도 몸에서 멀리할 수 없게 된 문명의 삶에서 찾아진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은 우리들이 자연으로 걸음하여 그 속에 묻혔을 때이다. 우리는 문명을 떠나 자연으로 갔을 때조차도 여전히 문명에 질기게 묶여 있다. 때문에 우리는 “라디오조차 들을 수 없는 오지”로 들어가도 “처음 며칠간은 휴대폰 벨소리가 수시로 들”릴 정도로 문명의 ‘환청’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곳의 “진공 같은 고요” 속에서 지낼 때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문득 솔숲을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의 결과 무늬를 정돈하다가/내 몸이 나의 외부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적잖이 난감했더랬습니다
—이문재, 「서신」 부분

우리는 우리의 몸이 우리의 내부에서 또다른 우리와 밀고 당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몸 밖으로 쫓겨나 있다. 나와 내 속의 내가 겪는 그러한 분화는 시인이 “귀농한 지 사년째, 이제 겨우 뿌리를 내린 것 같다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도 다시 확인이 된다.

스물다섯 이후 나는 늘 과적이고 과속이었다 과잉이었다 가끔 펑크가 나기도 했다 재생 타이어를 쓰기도 했다 마음은 늘 목적지에 가 있었다
휴게소에 들르지 않아서 그런지 약간 어지러웠다 뿌리를 내려서 그런지 집을 떠나는 적이 없는 친구네 집까지는 사십여 킬로미터
고갯마루에 차를 잠깐 세웠다 먼 집들, 하나씩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맨손체조를 하고 심호흡 몇 번 하고 다시 차에 차려는데
저런, 운전석에 누가 앉아 있었다 한 사내가 두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쿨럭쿨럭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찾아와 울고 있었다
—이문재, 「내 뒷모습이 보인다」 부분

그러나 문명으로 인하여 우리 몸에서 우리가 쫓겨났다는 인식은 현대 문명의 위력을 과소평가한 결과일 수 있다. 현대의 기계 문명은 그 힘이 우리를 쫓아내는데 그칠 정도로 그렇게 미약하지 않다. 시인의 생각과 달리 현대 문명은 우리들을 우리의 몸밖으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몸을 그 문명으로 완전히 점령해 버린다. 우리의 몸은 문명에게 쫓겨나서 머무는 유배지가 아니라 문명에게 점령당한 식민지이다.

몸 속에 웹 브라우저를 내장하게 되었어. 야금야금 제 속을 파먹어 들어가는 달. 신이 몸 속에 살게 되었어. 신은 이제 몸 속에서 키울 수 있는 존재야. 몸 속에는 사철나무. 산. 몸이 잘린 불상. 금칠이 벗겨진 십자가. 당신이 보낸 천년에 한 번 우는 새. 당신이 내게 올 때 걸었던 최초의 오른발과 왼발. 기어이 제 살을 다 파먹은 달. 그물로 된 달. 그물에 걸린 신들의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들과 발가락들을 생각해봐. 몸 속이 점점 비좁아지고 있어… (하략)
—이원, 「몸이 열리고 닫힌다」 부분

사철나무나 산과 같은 자연도 브라우저를 통하여 채워갈 수밖에 없는 문명 식민지로서의 몸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러한 삶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비극이다. 인터넷과 컴퓨터 없이 어떻게 살아간다는 말인가. 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이 비극을 전복시킬 여지가 남아있다. 우리는 가끔 걸음하는 자연 속에서 잠깐이지만 우리 몸에서 쫓겨난 우리를 되찾을 수 있으며, 아예 도시를 버림으로써 그러한 비극적 삶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몸의 비극은 아직은 비극의 극점은 아니다.
나는 이제 시인들의 몸 이야기를 따라 걸음을 옮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슬픈 비극의 극점에 도달한다. 그 비극의 끝에서 나는 내 안에서 나의 자리를 찾을 수 없는 운명을 만난다.

내 몸을 다
뒤지고 돌아다녀도
내 들 곳은 없어라, 내 몸의
벼랑에 서서 생각하느니
저 꽃의 몸으로
저 바위, 저 파도의 몸으로
저 새의 몸으로
태어났다면 나는 지금껏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채호기, 「게이 1」 부분

내 몸이
내게 맞지 않다.

몸에 갇혀
끙끙거리는
나 아닌
몸 속에
다른 이의
애타는
목소리.

덜컹거리는 몸에 실려
나의 일생을 떠메고 가는
잘못 입은 너의
몸의
쓸쓸한 뒷모습.
—채호기, 「게이 4」 전문

게이에게 몸은 ‘남자’가 감추어져 있는 몸이다. 그 몸을 좀더 깊이 들추면, 우리는 그 몸속에서 남자보다 더 “오래 전부터 있던 한 여자를 만”(채호기, 「게이 2」)난다. 그 여자에게 몸은 그녀가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육체의 어디를 들쳐보아도 머물 곳을 찾을 수 없어 “육체의 경계를 빠져나와” 또다른 “네 몸으로의 험난한 벼랑을 기어오”(채호기, 「게이 1」)르며 살아가야 하는 삶, 그것이 바로 게이의 몸이 겪는 비극적 삶이며, 그것이 비극의 극단이다. 나는 몸 속으로 떠난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에서 그 비극의 극단을 만났으며, 그 자리의 몸은 몸이 아니라 ‘벼랑’이었다.

3
몸이란 무엇인가. 언젠가 보았던 공상과학 드라마 속에서 외계인들이 물주머니라고 수근거렸던 우리의 몸은 시인들이 더듬어간 손길 끝에선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그 몸은 꿈과 깨달음의 둥지, 또는 세상을 뒤엎은 전환의 자리로 열려 있다가 굳은 마음이나 분노, 또는 우리 안의 두려움으로 닫히기도 한다. 또 그 몸에선 여전히 자연의 속성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들이 문명에 밀려 우리로부터 쫓겨나기도 하고 아예 문명에 점령당하는 비극을 맞기도 한다. 그리고 그 비극의 끝에선 내 몸에서 나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슬픈 게이가 벼랑을 기어오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몸은 온갖 삶이 뒤섞이는 우리 안의 우주이다. 우리의 몸은 때로는 열리고, 때로는 닫히며, 또 때로는 그 안에서 세상이 뒤집힌다. 또 내가 나에게 쫓겨나거나 문명에 점령당하는 비극이 그곳에 있고, 간혹 내가 내 자리마저 찾을 수 없는 비극의 극단에 선 운명이 우리의 몸 속에 있다.
(『현대시』, 2009년 9월호)

**시들은 다음 시집에서 인용되었다.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1994
-양선희, 『그 인연에 울다』, 문학동네, 2001
-이원,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문학과지성사, 2001
-김혜순, 『한 잔의 붉은 거울』, 문학과지성사, 2004
-이문재, 『제국호텔』, 문학동네, 2004
-이수명,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문학과지성사, 2004
-진수미,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 문학동네, 2005

2 thoughts on “시의 몸 이야기

  1. 몸이 우주라서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내시경과 엑스레이로 탐구해보지만 겨우 달나라에 한번 가 본 실력이라
    우주를 알기에는 택도 없습니다.
    때론 몸의 주인이라는 사람도 오십견이 왜 오는지를 모르고요.
    내 몸이 나의 외부였다는 사실을 깜빡합니다.
    첫울음으로 시작한 비극적 몸뚱이를 해피엔딩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1. 가장 비극적인 경우를 앞에 놓고 몸이 꿈이 되는 걸 뒤에 배치했다면 해피엔딩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비극도 몸의 운명이 되면 문학 속에선 사람 마음을 움직이니까 그게 더 의미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