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정도 여행하고 싶었다. 떠난다는 느낌이 확연한 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처음에는 원주를 떠올리고 그곳의 상원사와 치악산을 머리 속에 그려보기도 했지만 원주는 서울에서 너무 가깝다. 가까운 곳은 떠난다는 느낌을 안겨주지 못한다. 하루면 몰라도 여행 날짜를 이틀이나 사흘로 늘리는 순간, 원주는 마치 서울의 턱밑처럼 느껴지고 만다. 그보다는 좀더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손가락에 꼽힌 곳은 부산이나 여수였다. 여수는 밤열차를 타고 내려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마음은 여수보다 부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여행을 생각하면서 몇 가지 마음 속에서 정해놓은 것이 있었다. 첫째로 묵지 않고 계속 움직이기로 했다. 그러러면 심야 버스나 심야 열차를 타야 한다. 나는 잠자는 동안에도 머물지 않고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둘째, 먹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이번이라고 하여 유난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혼자 떠도는 동안에는 잘 먹질 않았다. 셋째는 택시는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난 버스나 기차를 타고 움직일 것이다.
집을 나온 것은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고 있는데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지나간다. 항상 유모차나 리어카를 끌고 구부정한 허리 위에 힘겨운 삶을 온통 다 짊어진 듯한 분들만 보았는데 오늘의 리어카는 오토바이 뒤에 매어져 있었고, 할아버지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뒷자리의 할머니가 내렸다 탔다를 반복하며 폐지를 뒤쪽의 리어카에 싣고 있었다. 이 일도 경쟁이라더니 아무래도 우리 동네 폐지는 이들 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다 싹쓸이를 할 듯이 보였다. 있는 자들이야 누가 하나 싹쓸이를 한다고 해도 나머지가 먹고 살 길은 막히지 않겠지만 없는 자들의 경쟁은 상대의 생존을 위협한다. 걱정스런 풍경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부산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나는 강변 터미널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천호 사거리에서 천호대교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버스가 그대로 직진을 하고 만다. 나는 참 자기 중심적이다. 그 순간 내가 버스를 잘못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이 버스가 오늘따라 왜 엉뚱한 길로 가지하고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 비로소 나는 내가 탄 버스가 전혀 강변 터미널로 가지 않는 버스란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나를 돌아보는 반성을 먼저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버스를 먼저 의심하고 그 다음에 나를 돌아본다. 버스가 오고 있을 때 머리 속의 생각이 어지러웠던 나는 그냥 눈앞의 버스가 강변 터미널로 가는 버스이려니 생각하고 무작정 버스에 올라선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를 놓고 머리 속이 어지러웠던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버스를 내린 것은 올림픽 공원에 이르러서 였다. 터덜터덜 걸어서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고, 결국 잠실역에서 열차를 바꿔타고 강변역으로 건너갔다.
내가 강변 터미널의 창구에서 부산 해운대행 심야 버스의 시간을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밤 12시란 것이었고, 그 버스표를 한장 달라고 했을 때의 시간은 5시 30분쯤이었다. 오후 네 시에 집을 나와 잘못탄 버스에서 내리고 지하철을 이용하여 동서울 터미널까지 가는데 1시간 30분의 시간을 보낸 셈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밤 12시까지 대략 여섯 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버스표를 끊고 바깥으로 나온 내 머리 속에서 떠오른 곳은 바로 근처의 건국대학교였다. 한때 그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딸이 어릴 때였다. 종종 아이를 데리고 그곳으로 놀러나가곤 했었다. 건대의 부속병원인 민중병원을 자주 들락거리곤 했었다. 호수가 있어 풍경도 좋았었다. 그래 그곳에 가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자.
그러나 내가 살았던 시절에 드나들었던 건대는 이제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대학의 한 가운데 있는 일감호라는 호수는 여전했지만 생경한 주변 풍경으로 둘러싸인 탓인지 그 호수도 옛날의 그 호수가 많나 싶었다. 대학병원치고는 아담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던 민중병원은 이제 거의 온대학을 다 점령하고 있는 듯 싶었다. 내 기억 속의 황량하던 빈터를 밀고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물들이 생경하기만 했다. 하지만 내가 외면했던 그 오랜 시간 동안 이 공간에서 함께 한 사람들의 기억은 지금의 풍경과 매우 친숙할 것이다. 다만 나는 그들이 달리 고집스런 오랜 기억을 갖고 있을 뿐이다. 있던 곳을 오래 떠났다 온 자는 기억의 고집을 버리지 못한다. 내가 떠난 뒤로 이곳의 내 기억은 그때부터 잠에 들었다가 내가 다시 돌아온 날 비로소 일어나 부시시한 눈을 비빈다.
기억의 고집은 건대에서 거의 한 장의 사진도 못찍게 만들었다. 어찌보면 오래 전에 살던 곳을 방문한 자의 내면에는 기억 속의 장면을 현재의 장면과 겹치면서 흐릿해진 저편의 세월을 다시 선명하게 인화해 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욕망은 기억의 풍경을 밀어버리고 새롭게 들어선 풍경들 앞에서 당혹감을 감추질 못한다. 나의 걸음은 건대를 빠져나가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었고, 그렇게 건대를 빠져나간 걸음은 어린이대공원의 정문에 이르고 있었다.
어린이 대공원 앞에는 세종대가 있다. 그곳은 내가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수도여자사범대학이었다. 몇번 어린이대공원에서 놀러갔던 기억을 갖고 있는 나는 고집스럽게 아직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어떤 사람에겐 대학의 발전으로 비쳤을 세종대 교문 옆의 엄청나게 큰 현대식 건물이 내게는 많은 과거의 기억을 집어 삼킨 채 서 있는 엄청난 식욕의 공룡처럼 보였다.
걸음은 어린이 대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과거 입장료 받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문닫을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들어가고 나가는 걸음에 제약이 없다. 아이들이 돌아간 공원의 놀이터가 텅 비어 있다. 멀리 건대의 새로운 교문 쪽에 있는 높은 건물이 보인다. 눈앞에 보이지만 사실은 아득한 거리이다. 높고 화려한 건물은 멀리서도 가까운 듯한 환시를 불러온다.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딱 좋은 특징이다.
마감 시간의 공원은 텅비어 있었다. 나무들도 텅비어있다. 마감이란 시간이 더해지면서 텅빈 느낌은 더욱 강화된다. 마감 시간이 없는 숲속이었다면 아마도 한적한 느낌이 나무들의 저녁 시간을 함께 했을지도 모른다.
대공원 후문을 걸어나온 걸음은 그 다음 여정을 인사동으로 잡았다. 인사동에선 상점을 기웃거리며 어느 정도의 시간을 흘려 보낼 수 있다. 인사동의 거닐 던 걸음이 어느 상점 앞에서 멈추었다. 아마도 기념품 상점일 것이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상점의 한가운데로 크거니 작거니하면서 높낮이를 오르내리고 있는 등의 불빛이었다. 그 불빛은 왜 내 눈길을 끌어간 것일까. 호롱불의 시절을 살았던 내겐 그 빛이 오래전 기억 속의 불빛과 겹쳐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사동 갈 때 쌈지 갤러리는 거의 빼놓지 않고 들르는 것 같다. 많이 상업화되었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예술에 대한 젊은 꿈을 만나곤 한다. 갤러리의 구조 자체가 상업적이라기보다는 예술적이다. 나선형의 통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항상 맞은 편 통로의 사람들이 풍경을 연출한다. 오늘은 젊은 연인과 젊은 두 친구, 그리고 아저씨 한 명이다. 젊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 중이고 아저씨는 무엇인가에 무심하게 초점을 맞추고 걸음을 옮기고 있다. 젊은 사람들의 시선은 바깥으로 향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을 보고 있고, 아저씨의 시선은 바깥으로 벗어나있다.
종종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찻집 풍경이 좋을 때가 있다. 이곳 쌈지 갤러리의 찻집도 마찬가지다. 대개 사람들이 있어 사진을 찍기가 어렵다. 오늘도 대부분의 창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으나 이 창은 비어 있었다. 작은 전구의 불빛이 김처럼 서려 있었다.
쌈지 갤러리를 나와 인사동을 어슬렁거리던 걸음은 종로2가의 반디앤루니스로 이어졌다.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원래는 사람들이 앉아서 책을 읽도록 의자가 놓여있던 자리였으나 이제는 무엇인가를 파는 자리로 바뀌었다. 이곳에 나란히 앉아 책읽는 사람들의 풍경을 보는 것이 이 서점에서 맛보는 흐뭇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는데 오래 간만에 찾았더니 그 즐거움이 사라져 버렸다.
종각역에서 지하철 1호선에 올랐고 신도림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탔다. 잠실 방향으로 가면서 길게 시간을 보냈다. 지하철 안의 안내 화면이 망가져 있었다. 공포의 블루 스크린을 지하철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덕택에 안내 시스템을 돌리는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윈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구로 봐선 일단 재시동을 해야 할 듯 한데 내릴 때까지 계속 블루 스크린을 고집하고 있었다.
테크노마트의 지하에 있는 롯데마트에서 간단하게 국수를 한 그릇먹었다. 나올 때 보니 젊은 연인이 회전문을 세 바퀴나 돌면서 장난을 치고 있다. 연애의 신비로움이다. 회전문을 몇번 도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는 것이 연애할 때이다. 연애를 하면서 그 사람은 너무 따분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연애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연애를 할 때는 따분한 것이 하나도 없다. 뭘하든, 심지어 따분하고 지루한 것도 즐거워지는 것이 연애이다. 회전문을 세 바퀴나 돌며 재미나서 죽겠다는 표정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연애할 때밖에 없다. 연애를 하면서도 따분하고 지루하다면 그건 연애가 아니다. 연애는 둘이 즐거운 짓만 골라서 해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따분하고 지루한 것도 즐겁게 되는 신비가 있어서 연애이다.
밤 12시를 20분 남겨놓고 드디어 부산 해운대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의 시계는 지금의 시간이 11시 41분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부산까지 4시간 50분이 걸린다고 한다. 원래는 5시간 30분 정도가 걸리는 길이다. 다음에는 서울역에서 심야 열차를 타고 내려갈 생각이다. KTX가 아니라 무궁화호 열차를 타면 그렇게 비싸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버스에 탄 아주머니 한 분이 버스가 왜 이렇게 춥냐고 계속 투덜거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주머니는 부산가는 분이 아니라 춘천가는 분이었다. 춘천가는 버스는 우리 버스의 뒤에 서 있었다. 졸지에 엉뚱한 곳으로 갈 뻔 했던 그 아주머니는 우연히 다른 승객과의 대화 중에 이 버스가 해운대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부랴부랴 버스에서 내렸다. 그런데 빨리 춘천가는 버스에 오르질 않고 자신에게 엉뚱한 버스를 알려준 사람을 잡으러 다니고 있었다.
12시 정각에 곧바로 출발한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로 가질 않고 천호동 강변에 서 있는 스타 시티를 지나 중부고속도로로 향하고 있었다. 부산으로 가는 길이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원래 여행할 때 밤이라고 해도 잘 눈을 부치질 않는 편인데 이렇게 무박으로 여행할 때는 어쩔 수가 없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들어선 뒤로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는 칠곡휴게소에 버스가 서 있었다. 이곳에서 딱 한번 쉬고는 다시 울산으로 내달렸다. 울산의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을 내려주고는 새벽 다섯 시경 부산 해운대에 도착했다. 끝까지 해운대까지 함께 한 승객은 전체의 3분의 1 정도였다.
6 thoughts on “밤 12시까지 서울에서 버티기 – 무박 3일의 부산 여행 1”
흔들리는 호롱불~♩♬ 그리운 얼굴 되어 흐르는 별빛 따라 내마음 속에 머무네~♩♬
언제나 진실만을 아끼고 사랑하자~ 그약속을 지키며 너를 그리워 하노라~♩♬
-> 노래 ‘긿을 잃은 친구에게’ 중에서
처음 듣는 노래네요.
아는 노래였으면 함께 흥얼거렸을 텐데..
글자로 노래듣는 맛도 괜찮군요.
시간을 이렇게 보내는 방법도 있군요.
건대야 그렇다 해도 세종대의 저 기괴스럽기까지 한 건물과 풍경은
정말 정체불명, 국적불명의 비호감입니다. 학교 이름하고 영 안 어울리잖아요.
건대도 들어가 보면 못지 않습니다.
그냥 건물만 꽉꽉 채워넣어 옛날의 헐렁하던 기억을 갖고 있던 저 같은 사람에겐 정말 답답하더군요. 저기 살 때가 90년대 였으니 세월은 참 많이 흐른 듯 싶어요.
/내가 버스를 잘못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이 버스가 오늘따라 왜 엉뚱한 길로 가지하고 묻고 있었다./아… 그게..저도 그런데….하하하
음…이제 그 다음 이야가 슬슬 궁금해지네요^^
좋은 하루요! 따님이 잘 돌아왔다는 소식 참 반가웠어요!^^
돌아와서 함께 있으니 마음은 편한데.. 일본 원전이 제대로 처리를 못해서 계속 걱정이예요. 나라가 너무 허술한 것 같기도 하고..
요즘 블로그에 놀러도 못가네요. 오신 김에 따라서 놀러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