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유의 시대에서 접속의 시대로
언제부터인가 나는 더 이상 종이 사전을 뒤적거리지 않는다. 대신 사전이 필요할 때면 나는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 앞에 앉아 인터넷에 접속한다. 온라인 세상에선 사전이 넘쳐난다.
그 둘은 완연히 다른 세상이다. 내가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종이 사전의 세상은 완고한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A의 뒤에 B가 놓이고, 또 그 뒤는 C였으며, 그 질서는 흔들리는 법이 없다. 단어들은 마치 신분제의 굴레를 안고 태어난 숙명의 존재처럼 굳건한 질서에 따라 늘어선다. 절대로 B가 A의 앞을 엿보는 법이 없다. 그 완고한 질서가 우리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단어 찾기의 편리함이다. 그리고 단어들이 어떤 순서로 늘어서 있는가를 알고 있는 나는 언제나 그 차례를 짚어 내가 그 뜻을 알고자 하는 단어를 찾아낸다.
그러나 온라인 세상의 사전은 그와 다르다. 온라인 세상에선 단어를 입력하여 찾고자 하는 단어를 불러낸다. 입력은 대상을 부르는 행위이다. 곧 정말 이름처럼 단어를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 컴퓨터가 조금씩 음성을 인식해가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세상에선 이름을 다 부를 필요도 없다. l자를 하나 쳐놓으면 온라인 사전은 혹시 네가 찾는 것이 L로 시작하는 L-band나 L-driver, 아니면 l로 끝나는 49th parallel이나 a level은 아니냐고 물어온다. 한 자를 덧붙여 li까지를 치고나면 벌써 눈치빠르게 혹시 네가 찾는 것이 liability나 liable가 아니냐고 묻는다. 늘어놓는 단어는 물론 그 둘만은 아니다. 나는 내가 찾는 단어를 끝까지 쳐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단어는 내가 부르면 내 앞으로 나선다. 기계가 내 심중을 헤아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다는 착각마저 든다.
사람들은 제러미 리프킨의 이름을 인용하며 이러한 세상의 변화를 일컬어 소유의 시대가 접속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말하곤 한다. 사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나는 이제 더 이상 종이 사전을 소유하지 않으며, 다만 인터넷의 온라인 사전에 접속할 뿐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실은 음악의 세계이다. 영국에서 발간되는 오디오 잡지 『하이파이 초이스』의 2010년 11월호에는 지미 휴즈라는 사람의 흥미로운 글 한 편이 실렸다. 음악의 매체에 대한 기억으로 LP와 CD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그 글에서 휴즈는 처음 CD가 나왔을 때만 해도 음악의 매체와 관련하여 진짜는 여전히 LP였다고 말한다. 때문에 그는 CD로 음악 앨범을 소유하는데서 행복을 느끼는데는 몇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상황은 정반대로 바뀌었고 이제는 CD가 진짜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 둘은 모두 음악의 매체를 어떤 물리적 형태로 소유하던 시대의 유물이란 점에선 동일했다.
혼란을 가져온 것은 그 다음의 시대였다. 내가 구입한 음악을 다운로드하여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에 저장하겠냐고 묻는 시대가 온 것이다. 아니 이제는 더이상 저장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구입한 음악을 이제는 구름 속에 띄워두고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러한 기술을 가리켜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이라 불렀다. 그동안의 서버와 크게 다를 것은 없지만 이른바 그동안의 서버가 주로 웹을 염두에 둔 개념이라면 클라우드 서버는 문서와 음악 등 모든 컴퓨터 작업을 원격으로 하고 그것을 무선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세상을 염두에 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허황된 얘기를 듣고 나면 뜬구름 잡는다는 말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며 성장했지만 더 이상 뜬구름은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든지 뜬구름의 세상을 손에 잡을 수 있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휴즈의 말대로 이제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음악을 소유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된 앨범을 구매해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냥 음악의 매체는 MP3 플레이어에서 사용할 수 있는 파일의 형태로 갖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음악은 이제 소유가 아니라 접속으로 향유하는 대상이다. 소유의 시대는 가고 접속의 시대가 온 것이다.
시인들도 나와 똑같이 이 접속의 시대를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함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들의 안녕이 걱정이다. 그들이 도시 문명이나 기계 문명에 대해 항상 불협화음을 내왔던 그 동안의 전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약간만 눈을 떼었다 싶으면 벌써 알 수 없는 용어들이 넘쳐나며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엄청난 속도로 변화를 치닫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시인들에 대한 걱정은 더 더욱 커진다. 그들은 무사무사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소유의 시대를 뒤로하며 접속의 시대로 재편되고 있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시인들은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그것을 묻고 그들의 답을 들어본다.
2 여전한 시대와의 불화
디지털 세상과 아날로그 세상은 많은 차이를 갖는다. 가령 글을 쓰는 방식을 예로 들면 연필을 잡고 종이에 글을 쓰는 것이 아날로그 세상이지만 디지털 세상에선 자판으로 입력을 하며 글자는 모니터에 표시가 된다. 아날로그 세상에선 쓴다는 행위와 그 결과가 결합되어 있지만 디지털 세상은 쓴다는 행위를 입력 행위와 그것의 표시 공간을 분리하여 이룩한다. 내가 여기서 자판을 치는데 글씨는 자판이 아니라 모니터 위에 나타난다. 디지털 세상은 이러한 분리를 통하여 모든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간접화한다. 그에 반하여 아날로그 세상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시인에겐 그 분리와 간접화된 방식의 디지털 세상이 체온을 가로막고 있는 세상으로 읽힌다.
내가 마우스 위에 온전한 손을 얹고 있어도
여자와 마우스는 따뜻해지지 않고
그러나 마우스는 피카소의 여자 속에
나는 마우스의 등 위에 손을 얹고 있다
—이원, 「마우스와 손이 있는 정물」 부분
가령 내가 여자를 그려놓은 피카소의 그림을 한 점 본다고 하면 아날로그 세상에선 종이에 인쇄된 그 그림이 내 손에 직접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에선 그림 파일이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고,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그 그림을 꺼낸다. 아니 그 그림이 인터넷 상에 있다면 나는 그 그림으로 접속하여 그 그림을 모니터 상에 펼친다. 어느 경우에나 나의 손이 놓인 곳은 마우스의 위지만 그 마우스로 커서를 움직여 꺼내놓는 그림은 내 손위가 아니라 모니터 위에 펼쳐진다. 내 손의 체온은 더 이상 그림에 직접적으로 닿질 못한다. 디지털의 세상은 눈에는 보여주지만 체온은 차단한다. 시인에게 디지털 세상은 편리를 위하여 체온을 내놓은 싸늘한 세상이다.
디지털 세상은 체온만 차단된 세상이 아니다. 아울러 향기를 잃어버린 세상이기도 하다.
잉크 냄새가 밴 조간신문을 펼치는 대신 새벽에
무향의 인터넷을 가볍게 따닥 클릭한다
—이원,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부분
시인은 “클릭 한 번에 한 세계가 무너지고/한 세계가 일어”서는 디지털 세상의 편리함보다는 배달된 신문에서 풍기던 잉크 냄새에 대한 상실이 더욱 예민하게 와 닿는다. 우리는 신문을 기다리지 않고 언제든 펴볼 수 있는 편리함을 얻었지만 시인의 눈에 그것은 향기를 댓가로 지불한 결과였다.
디지털 세상은 모든 것이 쉽게 갱신이 된다. 한번 인쇄된 애기동자꽃의 사진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은 쉽지가 않지만 인터넷에선 그러한 갱신이 아주 손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시인에겐 그러한 정보 갱신의 편리성보다 서버가 꺼지는 순간 아무 것에도 접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우려스럽게 보인다.
…나는 업데이트된 애기동자꽃을
연다 그러나 애기동자꽃의 서버를 찾을 수 없다는
그곳에서 나는 갑자기 멈추어 선다 막힌 세계
너머에는 광활한 신대륙이 펼쳐지고 있겠지만 창은
금방 벽이 되어 내 앞에 선다
—이원, 「나는 검색 사이트 안에 있지 않고 모니터 앞에 있다」 부분
이제는 소유할 필요 없이 언제든지 원하는 것에 접속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접속할 사이트가 문을 닫으면 그 순간 디지털 세상은 애기동자꽃을 향하여 열린 창이 아니라 어디로도 갈 수 없게 우리의 걸음을 막은 벽이 되고 만다. 실제로 인터넷 세상에선 곧잘 사이트가 없어지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 디지털 세상은 그때마다 시인에게 창이 아니라 벽이 되고 만다.
디지털 세상에선 심지어 내가 나의 것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태도 빈번하게 벌어진다. 시인은 “28일 암호가 틀려 두 달간 쓴 일기에 들어가지 못하다 일기는 모니터 너머 암호 너머에 있다 다시 일기라고 쓰고 새 암호를 넣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암호를 잊어먹는 일은 그 후에도 다시 반복되며, 결국 시인은 “또 일기의 암호가 맞지 않”아 결국 “암호를 넣지 않고 일기를 쓰”(이원, 「시간에 관한 짧은 노트 2」)기로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내가 나의 것으로도 접속하지 못하는 시대가 디지털 시대이다.
또 다른 한 시인은 이 접속의 시대가 나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대는 나의 아바타가 나를 대신하며 서로의 몸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아바타를 내세워 접속한다. 접속의 세상은 우리에게 말한다. “자, 이제 골라 보시지/누구를 나로 택할 건지”라고. 시인은 그 세상을 가리켜 “이곳은 공간 없는 공간/육체 없는 육체”의 세상이라 칭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곳은 “세상에 없는 나를 만드는 일”이 가능한 세상이며, 나는 “마초? 뱀파이어? 몬스터 고양이? 4차원 소녀?” 등등 그 무엇이나 될 수가 있다. 심지어 내 마음의 상태까지 ‘기쁨’으로 설정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그 아바타는 나를 나타내기 보다 “방실방실한 웃음”으로 “내 어두운 바닥”을 “감쪽같이 감춰”주며 은폐를 공모하고, 그래서 이것저것을 골라 나의 아바타를 만드는 동안 그 이목구비가 오히려 내게서 낯설어 진다.
방실방실한 웃음
내 어두운 바닥 감쪽같이 감춰 줄
오렌지색 아우라
낯선 이목구비 그리는 동안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담즙질 영혼
아이콘의 화색이 화사해지는 동안
창백해지는 내 낯빛
너는 그렇게 강림하고
나는 나를 잊고, 잃고
익명의 네가 살아 숨 쉬는
여긴 가상일까 현실일까
불현듯
실수인지 고의인지
눌러버린 ‘삭제’ 버튼
순식간에 사라진 건
너일까 나일까
—강기원, 「아바타」 부분
시인은 혼란스럽다. 컴퓨터 앞에 앉은 자신의 존재가 현실을 확보해주고 있긴 하지만 나를 대신하는 아바타는 체온으로 와닿질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존재는 삭제 버튼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사라진다. 시인에게 디지털 세상은 나의 정체성을 뒤흔들고 손쉬운 삭제를 통하여 나를 잃어버리는 만드는 상실의 세상이다.
접속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도 컴퓨터라는 기계를 가운데 두고 사람을 만난다. 대면 접촉을 하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컴퓨터가 가로 놓이면 더 이상 우리는 이름의 존재로 만날 수가 없다. 컴퓨터는 우리들을 이름과 얼굴을 통하여 기억해주지 않으며, 다만 ID를 통해 확인해줄 뿐이다. 그동안 나는 하나의 이름과 얼굴로 나를 살아왔지만 ID의 세상에선 내가 접하는 세상마다 내가 달라진다. 나의 확인을 위해 내가 쓰는 ID는 나를 확인시켜줄 숫자화된 암호일 뿐이다. 시인은 우리들이 이전에는 이름과 얼굴의 존재였으나 디지털 세상의 우리는 우리를 확인하는 암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암호일 뿐인 나는
없는 채로 존재하며
존재하는 채로 사라진다
비밀리에 저장된 나는
그러나 누설되고 도용되고
변신의 유혹 끊임없이 받으며
내가 나를
(그 무수한)
기억하지 못한 채
무한 증식되어
점점 얇아져
점점 뭉개져
간다
—강기원, 「ID」 부분
디지털 시대의 나는 수많은 암호로 흩어져 있다 소멸되는 존재이며, 나도 기억하지 못한채 사이버 공간을 떠도는 존재이다.
디지털 세상은 계량화를 통해 만들어내는 순위의 세상이기도 하다. 순위를 결정짓는 것은 사람들의 접속수이다. 접속수, 또는 조회수는 곧 사람들의 관심과 동일시된다. 디지털 세상에선 관심을 받는 동안만 존재한다. 심지어 이 세상에선 죽음을 보내는 것도 슬픔이 아니라 순위이다. 순위는 관심의 양, 즉 조회수를 보여줄 뿐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지만 인터넷 세상은 바로 그 순위에 의해 움직인다. 그래서 시인은 “거짓말처럼 만우절에 투신자살했던/장국영이 다음의 인기 검색어 목록에서/오늘에서야 삭제되었다”고 전하며 그렇지만 그 검색어 1위와 그로 인하여 접하게 된 장국영의 어떤 사진도 그의 죽음에 관한 사실은 아무 것도 보여주질 않았다고 말한다. 즉 그가 “다른 이들을 제치고” “인기 검색어 1위에 올라 있”지만 “여자보다 애잔한 표정의 사진도/남성미 넘치는 근육질 사진도/그 어느 쪽도 동성애자의 속사정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어서도 마음대로 떠나지 못하고
죽어서 더 영화 같은 스캔들을 이어가던 그가
인기 검색어에서 삭제된 오늘
비로소 그는 죽었다
—장경린, 「인기 검색어에서 삭제된 오늘」 부분
그렇게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생시보다 더 생생한 힘을 발휘하며/삶과 죽음 사이에서/사이버 공간에서 오랫동안 떠돌”다가 죽는다. 시인에게 있어 디지털 세상은 “컴퓨터 모니터 전자식 화장터”이다.
더 큰 문제는 디지털 세상의 작동 방식이 아날로그 세상의 인간 관계로 그대로 전이되는 경우이다. 가령 사랑하는 두 사람은 대개의 경우 하나되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다. 그러나 둘이 하나 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내가 네가 되기도 쉽지 않고, 네가 내가 되기도 쉽지 않으며, 둘의 이별도 쉽지가 않다. 사랑으로 엮어진 둘의 사이에서 쉬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작동 방식을 사랑의 관계 속으로 그대로 전이시키면 사랑도 아주 손쉬워진다.
당신의 텍스트는 나의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당신의 텍스트
당신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나
나의 당신의 텍스트는 텍스트
—성기완, 「당신의 텍스트 1—사랑하는 당신께」 부분
“사랑하는 당신께”라는 부제로 미루어 이 시는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둘이 하나로 뒤섞이는 이 사랑 노래는 첫구절을 복사해서 붙인 뒤에 그 순서를 뒤섞는 방식으로 변주된다. 워드 프로세서에서는 얼마든지 손쉽게 구절을 복사해서 붙이며 순서를 뒤바꿀 수 있다. 워드 프로세서가 갖는 편리성이 그대로 사랑으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을 일러 제목에서 나의 텍스트라 하지 않고 “당신의 텍스트”라 일컬은 것은 보면 시인은 아직 이 시대에 몸을 담그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전이를 계속 짚어가보면 접속의 시대에서 겪는 우리의 사랑은 어떤 사이트의 도입부를 소개하는 플래시 화면처럼 서로에 대한 소개를 건너뛸 수 있는 사랑이자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일정이 된다.
시작 페이지: 사랑한다는 말도 없이 49%(플래시, 스킵 가능)
—성기완, 「당신의 텍스트 2—어떤 인터페이스」 부분
그래서 시인에게 이 시대의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 배설이며, 그 배설은 사랑을 아주 가볍게 만든다.
나는 몇 번이나 참았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에
이를테면 사정의 순간 직전에
나는 다른 말을 내뱉었죠
안에다 싸도 되냐는 식의
대답은 늘 하나였어요
안 된다는 것
나는 늘 그 대답에 안도했죠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무거워지지 않을 거라는 거
—성기완, 「당신의 텍스트 3—pc 통신 시대」 부분
굳이 접속의 시대가 아니라도 가벼운 배설의 사랑은 있었겠지만 “pc 통신 시대”라는 부재는 시인이 이러한 사랑을 디지털 시대의 산물로 바라보고 있다는 암시가 된다. 그리고 이에서 더 나아가 사랑은 아주 완벽하게 컴퓨터를 닮아버린다. 디지털 세상에서 사랑은 입력되는 것이며 그 입력을 통하여 잉태된다.
너는 나를 끔찍이 사랑했다.
자판 같은 눈과
마우스볼 같은 가슴과
프린터 같은 항문을.
주입식 섹스가 끝났다.
나는 나를 잉태했다.
나의 항문이 얼굴을 낳았다.
—박장호, 「페이퍼 레인」 부분
‘자판’과 같은 눈이니 눈을 쳐다보았을 때 마치 자판을 치듯 사랑이 입력되었을 것이다. ‘마우스볼’ 같은 가슴이니 가슴을 만질 때 사랑이 위치를 잡았을 것이다. ‘프린터’와 같은 항문이니 배설이 곧 사랑으로 출력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너와 내가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나를 잉태”하고 있으니 나의 자기 만족에 그치는 것이 이 디지털 시대가 그려내는 사랑의 초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인에게 이 시대의 사랑이 가벼워지는 것은 사람들 탓이 아니다. 그것은 접속의 시대라는 이 시대의 특성이 고스란히 사람들의 관계로 전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약 둘의 사랑이 뒤엉켜 둘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면 그것은 둘 사이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접속의 시대에서 그것은 시스템 탓이다.
사랑한다는말도없이(스킵)
가갸거거고딩중딩대딩직딩초딩아빠밥줘교구규그렇게당신을완전히가지려고하지도않기
—성기완, 「당신의 텍스트 5—잘못된 인코딩」 부분
시인에게 사랑이 뒤틀리는 것은 인코딩이 잘못되는 현상이다. 컴퓨터는 기계이기 때문에 우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때문에 우리의 말을 알아듣게 하려면 우리의 말을 기계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변환해야 한다. 그 과정이 인코딩이다. 그런데 그렇게 기계어로 옮겼다가 다시 그것을 우리의 언어로 환원시키는 과정, 즉 디코딩 과정에서 잘못이 발생할 때가 있다. 만약 사랑이 그런 인코딩 과정을 거치고 또 그것을 디코딩하는 과정을 거쳐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이라면 전체적인 시스템의 문제에 의하여 얼마든지 사랑이 뒤엉킬 수 있다. 사랑이 실패했다면 이제는 그것이 사랑의 당사자들 잘못이 아니라 인코딩 과정에서 발생한 시스템의 문제일 수 있다. 접속의 시대를 사랑에 투사하면 얼마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사랑이 깨졌다면 그것은 당사자들이 아니라 이 시대의 탓이다.
그런 면에서 이 시대의 사랑은 이별을 마주했을 때도 아픈 가슴으로 그 이별을 마무리하지 않는다.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확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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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확인 2007-10-26 13:50
헤어졌습니다
—성기완, 「당신의 텍스트 6—수신확인」 전문
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이별은 메일을 보내고 그것을 상대가 열어보았는가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요즘의 세상은 그렇게 메일을 보낸 뒤 상대가 메일을 수신했는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이별의 두 당사자는 보이지 않고 메일 시스템이 알려주는 “수신확인” 기능에 의해 이별이 완료되는 세상이 디지털이 만들어낸 세상이다.
디지털 세상은 남녀의 사이를 파고드는데만 그치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도 그 세상의 감각으로 물들인다.
사용 중인 공간: 119,685,120바이트
사용 가능한 공간: 13,238,272바이트
—장경린, 「재개발지역 3」 부분
인용된 시의 구절만으로 보면 마치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 가운데서 사용한 부분과 남아있는 부분을 말하고 있는 듯 하지만 이 시는 사실은 재개발 지역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처럼 손쉽게 재편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느낌을 갖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물론 재개발은 디지털 세상의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디지털 시대에는 더더욱 인간을 배제하고 가볍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예는 또 있다. 시인은 애국가가 끝난 뒤 지지적거리며 끓고 있는 텔레비젼 화면을 가리켜 “프로그램 지시 따라/좌우로 정렬하여/카드섹션하듯 삼라만상을 그려내던/전자들이/플랑크톤처럼 제멋대로 뛰놀며/자글자글 끓고 있는/전자의 바다”라고 말한다. 문제는 그 전자의 바다가 종종 내 몸에 들어와 박힌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우리의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플랑크톤처럼 반짝이며
내 몸의 전자들이 나를 이끌고 간
오프라인
동네 어귀 포장마차
편편한 기름접시에 갇혀 몸부림치고 있는
세발낙지들
토막 난 전자들
사방으로 튀는 참기름
—장경린, 「온라인 오프라인」 부분
“편편한 기름접시에 갇혀 몸부림치고 있는/세발낙지들”과 그것에서 튀어오르는 ‘참기름’은 분명 오프라인의 세계이지만 그것이 “토막 난 전자들”의 비유를 얻을 정도로 디지털 세상은 우리들의 삶으로 깊숙이 배어있다. 시인들에게 있어 디지털 세상의 느낌은 아날로그 세상의 감각까지 지배하는 지경에 이르고, 우리는 결국 그 문명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컴퓨터를 켜자마자 17인치 모니터가 얼굴을 진공청소기처럼 쭉 빨아 당겼다 눈코입이 딸려 들어가고 가죽만 책상 모서리로 흘러내렸다 미지근한 가죽을 들어 신년 달력 옆에 걸어놓는다…
—이원, 「자화상」 부분
그리하여 디지털 세상의 영향이 가장 극에 달한 지점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우리 몸에 깊이 배어든 기계 문명의 세상이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우리들이 이제 “몸 속에 웹 브라우저를 내장하게 되었”다고. 그 세상은 마치 우리들이 신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시인은 “신이 몸 속에 살게 되었어. 신은 이제 몸 속에서 키울 수 있는 존재야”(이원, 「몸이 열리고 닫힌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쉽게 찾을 수 있고 모든 것을 쉽게 복제할 수 있다. 우리는 신적 존재이다. 그 신적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기계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머리를 떼어놓고
머리 대신 모니터를 달고 다닌다
모니터 안에 암내가 주입되어 있는지
하늘이 자주 지퍼를 배꼽 근처까지 내리고
레고블럭 같은 공기들은 허공에 끼워지고 있다
—이원, 「공중 도시」 부분
시인의 눈에 우리의 일상은 이미 기계에 점령당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이보그이다.
텔레비젼의 플러그를 빼고, 오디오의 플러그를 빼고, 가습기의 플러그를 빼고, 스탠드의 플러그를 빼고, 냉장고의 플러그를 한 번 더 꽉 꽂고… 기계들에 기숙하는 나는 집을 나서자마자 주유소로 뛰어갑니다
—이원, 「사이보그 1—외출 프로그램」 부분
“허공에 주소를 갖게” 된 세상, 사람들이 “허공이라는 시스템에 연결되”(이원, 「콘센트에 관한 명상」)어 살아가는 그 세상은 시인의 눈에는 “뿌리가 없”(이원, 「실크 로드」)는 세상이며, 아울러 “발자국이 찍히지 않”고 “허공을 만질 수는 있어도/서로의 몸”(이원, 「사막을 위한 변주」)은 만져지지 않는 온기를 잃은 세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편리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디지털 세상에 대해 시인들의 눈은 그렇게 호의적이질 못하다. 그 세상은 온기와 향을 댓가로 치루고 얻어낸 편리로 사람들의 정체성을 빼앗아간 세상이며, 사랑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감각을 가볍고 경박하게 몰아가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이미 우리 몸에 이식되어 우리들을 모두 사이보그로 만들어버린다. 시인의 눈에 우리들은 우리들이 신이라도 된 것인양 착각을 하며 사실은 사이보그로 살아가고 있다.
3 시인들이여, 부디 사이보그가 된 나를 구하시라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들의 안녕을 걱정했던 나의 우려는 거의 짐작대로 이다. 나는 하루 종일 인터넷에 접속하여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고 놀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서 일상적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 대해 시인들의 심기는 말할 수 없이 불편하다.
이해가 간다. 그리고 이해가 가는 한편으로 아쉬움이 크다. 시인들이 정말 이 디지털 시대의 또다른 의미를 알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이 디지털 문명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너무 강해 이 문명이 그 이전의 아날로그 문명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거의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의심마저 든다.
가령 디지털 문명이 우리들의 정체성을 흔들고 혼란시킨다는 시각은 그동안 우리들이 이름 하나의 정체성에 묶여 왔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겐 우리의 이름 하나에 묶인 나를 벗어나 다른 나를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없었을까. 아마도 필명은 그러한 욕망의 아날로그적 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엔 누구나 손쉽게 그것을 이룰 수 있다. 여기선 이 ID로, 저기선 저 ID로 다르게 나를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의 구속을 벗어난 해방의 즐거움이 디지털 세상에 펼쳐지고 있는데 시인들은 하나의 이름 아래 내 정체성을 속박시켜야 했던 아날로그 시절을 마치 우리 자신을 지키고 살았던 시대인양 혼동한다.
디지털 세계의 작동 방식이 세계를 보는 시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은 사실은 사랑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주체가 사람이란 사실을 잊고 있다. 즉 그것은 기계의 문제라기보다 기계를 사용하면서 기계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문제이지 기계의 문제가 아니다. 칼을 들었다고 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지 기계가 아니다. 시인들의 우려를 접하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초점을 엉뚱한 곳에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기계 문명이 우리들에게 주입되어 우리들의 삶이 이미 사이보그와 같은 상태라는 인식도 그럴 듯하긴 하지만 그럼 이전의 아날로그 세상에선 어떤 상황이었을까를 묻게 된다. 가령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보자. 그때 우리들의 삶은 완전히 자유였을까. 아마도 자연의 질서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계 문명은 어느 정도 자연의 질서가 갖는 속박으로부터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았을까. 기계 문명이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측면은 있겠지만 그 이전이라고 하여 우리가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의 질서가, 또 아날로그 시대의 질서가 디지털 시대의 질서보다 더 완고한 측면이 있다. 디지털 시대가 순위로 모든 것을 계량화하는 시대라는 시인의 지적이 수긍이 가는 한편으로 그 순위의 뒷편에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채 거대한 기계만이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부산 영도 조선소에서 김진숙이라는 노동자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반발하여 농성을 벌이고 있을 때 트위터에선 사람들이 공모하여 그 김진숙을 검색 순위의 1위로 밀어올렸다. 디지털 시대는 순위의 세상이지만 아울러 그 순위를 통하여 혁명을 꿈꾸게 한다. 그 전까지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디지털 문명은 그 동안의 기계 문명과는 다른 측면이 많다. 하지만 시인들은 이 문명을 깊이있게 파고들지 못하고 그동안의 기계 문명과 똑같이 바라본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속깊은 이해를 하기엔 디지털 문명이 너무 복잡하다. 가령 흔히 디지털 문명의 특징 중 하나로 복제를 입에 올리면서 복제를 하고 나면 원본과 사본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그러한 문제들도 현재 약간씩 극복되어 가고 있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사진을 블로그에 올려놓을 경우 원 저작자 이외에는 원래의 파일명을 거의 짐작할 수 없게 되어있다. 즉 원파일과는 다른 파일명으로 사진이 게시된다. 복사는 편리하게 할 수 있지만 원본의 진위를 따지는 순간 복사본이 드러날 여지가 많다.
시인들은 디지털 세계의 편리성이 집어삼킬 세상에 대해 촉각이 예민한 나머지 아직까지는 이 새로운 세상이 가져온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짚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내게 있어 디지털의 문명은 아날로그 세계가 인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해온 오랜 질서의 독재와 그것에 대한 해체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고 있는 전혀 다른 측면의 얼굴을 갖고 있다. 나는 하루 종일 그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또 하루 종일 그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시인들이여, 제발 디지털 세계의 바깥에서 매일 걱정과 우려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만 있지말고 하루 빨리 해방의 전사로 이 세상으로 들어와 정체성을 잃고 사이보그가 되어 버린 나를 부디 이곳에서 구하시라.
(시산맥, 2011년 가을호, 평론)
6 thoughts on “접속의 시대, 그 한가운데 선 시의 세상 — 디지털 문명을 바라보는 시인들의 시선”
그리고 디지털에는 디지털 치매가 있죠.
자고로 문학은 책으로 읽어야 좀 맛이 나던데..
아닌가…참…어댑팅이 안되는 스타일이라서요.
저는 컴으로 글을 읽으면 왠지 스며드는 느낌은 덜하더라고요. 아니면 디지컬이 제대로 스며들게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면 달라지려나..
안녕하세요?
안부전합니다.
문학은 특히나 책으로 읽어야 되는 듯 싶어요.
그런데 적응하기 나름이다 싶어요.
나이를 먹어 눈이 나빠지니까 요즘은 오히려 글자를 키워서 볼 수 있는 컴퓨터가 편하더라구요.
당췌 글자가 잔 책은 읽을 수가 있어야지요.
화면에서 커다랗게 키워놓고 읽으니까 그건 아주 편해요.
안부 접수했습니다.
저도 그럭저럭 잘지내고 있어요.
이건 시인들보다는 생활인들이 읽을 만한 글인 것 같습니다.
아날로그 시인들은 그 세계에서 스스로 탈옥할 때까지 내비두시지요.
인용하신 여러 디지털 시인들 가운데는 이원 시인이 비교적 제게 어필하는데요.
디지털 문명을 다룬 시인 가운데서 이원 시인이 가장 뛰어난 거 같아요. 그래도 한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어요. 가끔 디지털 문명의 핵심을 잘 모르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렇게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생시보다 더 생생한 힘을 발휘하며/삶과 죽음 사이에서/사이버 공간에서 오랫동안 떠돌”다가 죽는다. 시인에게 있어 디지털 세상은 “컴퓨터 모니터 전자식 화장터”이다.’
음…. 생시보다 더 생생한 힘… 공감이 가는 말이에요..
‘기계의 문제라기보다 기계를 사용하면서 기계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문제이지 기계의 문제가 아니다’
예… 아는것 별로 없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사람이 문제 맞는듯해요
사람으로 인한….
긴 글을 읽으며 저도 몇년전에 읽었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가 떠오르네요
어느 시대이던지 그 시대엔 파격적인 일들이 ..시대가 바뀌면서는 일상이 되고
더이상의 위험도 아닌게 되는듯요
동원님 말씀대로 ‘사람’의 문제인듯…..
좋은 하루 보내세요*^_^*
디지털 시대가 좋은 점도 있고 안좋은 점도 있는데 시인들이 아직은 그 실상의 겉만 핥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요.
난 선을 타고 살아갈거야.. 그것도 쏜살같이 너를 향해 내달으면서.. 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너와 갈라서 있어도 언제나 네 곁애 있을 거야.. 라는 좀 획기적 발상의 시들을 만나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없는 듯 싶어요.
이제 집이 다 마무리되었어요. 우리 집을 기점으로 삼아 자주 얼굴을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