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의 뒤로 회화 느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미리 작품을 볼 수 있는 자리를 가질 수 있었고, 그 자리에서 작가 한미에게 한 말이었다. 작가는 나의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 말을 수긍하면서 이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내게 있어 때로 도예 작품은 평면의 그림을 입체적으로 일으켜 보려는 욕망이기도 하다. 반대로 그림을 그릴 때면 나는 입체적인 세상이나 풍경을 평면에 눕혀 보려는 욕망을 갖는다.”
사실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욕망은 주로 텍스트로 귀착된다. 나는 산이나 풍경을 마주하면 그런 산을 하나 만들어보거나 풍경을 조성할 욕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산과 풍경을 텍스트에 담아보려는 욕망을 갖는다. 가령 오대산의 비로봉에 올라 내려다보는 푸른 산의 능선은 “푸른 파도로 일렁이며 세상을 헤엄치고 있는 형상”으로 텍스트에 담기고 결국은 아주 오래전 퇴적되어 쌓일 때 그 몸에 새겨졌던 “바다의 푸른 기억”이 된다. 또 바람부는 날 물결이 이는 강의 풍경은 “강의 표면을 뛰노는 바람과 그 강에 찍히는 무수한 바람의 발자국”으로 텍스트에 담긴다. 세상을 텍스트에 담을 때 텍스트는 단순히 세상의 전달이 아니라 굳은 표현 속에 갇혀있던 세상에서 새롭게 여는 길이 된다.
도예가 한미에게 있어 작품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아마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평면으로 누워있던 그림을 일으켜 도예 작품에 담을 때 그는 그림으로 열기 어려운 어떤 새로운 느낌이나 길의 모색에 나서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이 그가 도예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영혼의 기울기전>이란 제목 아래 일으켜 세운 작품들은 어떤 세계를 새롭게 열려고 한 것일까. 나는 그 의문을 마치 사람들을 그의 작품 세계로 안내하는 방향 표지판처럼 앞에 세우고는 그의 작품들과 만나 보기로 한다.
2
도예가 한미가 <영혼의 기울기전>이란 전시회 제목 아래 빚어낸 작품들이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은 작품을 마주하면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작품이 남녀의 사랑을 담고 있다면 그것의 시작은 남자와 여자였을 것이다. 실제로 작품에는 홀로 있는 남과 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작품의 생성 순서는 남과 여로 시작되지 않았다. 작가 한미의 손에서 가장 먼저 탄생한 작품은 내 기억으로는 남과 여가 아니었다. 그 둘은 작품을 빚는 순서에서 거의 가장 마지막에서야 완성이 되었다.
내가 작품 생성의 순서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도예가 한미와 친분이 있어 전시회 준비를 위해 작품을 빚는데 열심이던 그의 공방을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작품을 들여다보아선 전혀 알 수 없는 작품 생성의 순서, 그러니까 작품의 외적 비밀 하나를 챙길 수 있었다. 그 비밀에 의하면 작가는 사랑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빚어내며 사실은 그 사랑이 시작되던 자리의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즉 작가는 작품의 최종 지점에서 사랑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시작되기 이전의 지점에 선다. 마치 거센 물살을 헤쳐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거슬러오르는 연어처럼. 아니 그는 연어 이상이다. 연어는 시작 지점에 도착하여 원점 회기를 하는 것으로 오랜 길의 여정을 마무리짓지만 작가 한미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가끔 그러한 욕망을 갖게 되지 않을까. 사랑하고 살아가다 문득 어느 날 우리의 사랑이 시작되던 지점으로, 아니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날들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도예가 한미가 사랑의 시작,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 이유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작품을 텍스트로 눕히고 싶은 나는, 작가가 걸었던 생성 순서가 아니라, 즉 작가를 따라 원점 이전으로 회기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걸음이 끝났던 최종 지점에서부터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원점 회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그 지점과 어떤 사랑의 완성 사이로 이어지는 흐름을 마련하는 노력이 작가의 몫이라면 작가가 마주했던 그 회기 지점을 시작 지점으로 삼아 어떤 시작과 완성을 잇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흘러가 볼 수 있는 것이 작품에 대한 감상자의 특권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의 최종 지점에서 마주한 사랑, 그 시작의 이전에 섰을 때 내가 만난 것은 서로 각각 따로 선 남자와 여자였다. 작가 한미는 그 남과 여를 <카오스>라고 명명한다. 남자와 여자는 혼자 있을 때 자기 동일성을 갖는, 혼란스럽지 않은 자기 충만의 존재였을 텐데, 왜 그는 홀로 서 있을 때의 남자와 여자를 텅빈 상태의 혼돈으로 본 것이었을까. 내가 나로만 채워져 있을 때, 우리는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혹시 비어있는 혼돈의 상태인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는 나만으로는 채울 수 없고, 반드시 둘을 통해서만 서로 채울 수 있는 세상이 있고, 그것이 바로 사랑의 세상인 것일까.
작가 한미의 세상에서 마주한 여자는 땅이고 남자는 하늘이다. 그렇다고 그 의미를 우리의 편견에 맞추어 곡해할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하여 한미의 작품 속에서 여자가 땅이고 남자가 하늘이란 것은 여자는 낮고 남자는 높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미의 작품에서 여자는 땅이 되고 남자는 하늘이 된 것은 그 둘 사이가 사랑 이전에는 하늘과 땅의 아득한 거리 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이였다는 의미로 읽힌다. 말하자면 둘이 서로 떨어져 남자와 여자로 각각 서 있을 때의 남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제 그 둘을 한번 만나보자. 먼저 여자이다.
여자에는 여자가 담겨있다. 혹 여자에 남자가 담기는 경우가 있기도 하나 대개는 우리의 세상에서도 여자에는 여자의 몸이 담겨있다. 그러나 작가 한미는 그녀를 가리켜 비어있는 땅이라고 말한다. 그 비어있는 땅은 몸은 정면으로 내주고 있지만 고개는 모로 돌리고 있다. 왜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여자로 채워져 있는데도 왜 작가 한미는 그녀가 비어있는 땅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여자를 여자로 채워놓고 비어있다고 말하는 한미의 전언은 여자를 여자의 몸으로 채워져 있는 존재로 보지 말고 무엇인가로 채워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라는 권유로 읽힌다. 몸은 욕망의 대상이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려 한다. 그것을 가져다 내 욕망을 채우려 한다. 몸만 정면으로 내주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여자는 여자의 몸에서 비어있는 땅을 보지 못하면 당신이 얻을 것은 그저 몸밖에 없다는 전언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태초의 여자는 내주면서 고개를 돌리고 있다. 내주지만 내주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번에는 남자를 만나볼 차례이다.
여자만 여자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남자 또한 남자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한미는 그 채워져 있는 남자를 텅빈 혼돈의 하늘이라고 말한다. 여자의 경우에는 비어있는 땅으로서의 여자가 여자를 채워주어야할 대상으로 보라는 권유로 와닿지만 남자의 경우에는 남자로 채워져 있는 남자가 남자를 비우라는 권유로 와닿는다. 아마도 우리의 세상에서 여자의 몸이 욕망을 자극하는 매개체가 되고, 남자의 몸은 그 몸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고 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남자가 몸은 정면으로 내주면서 고개를 돌린 것은 몸으로 여자와 하나되고 싶어하면서도 여자의 몸에 들끓는 욕망을 들이부어선 안된다는 어떤 자제력을 감지한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몸을 정면으로 내준 두 남녀는 어떻게 만나게 되는가. 남자와 여자가 다르듯이 남자와 여자의 만남도 남녀가 다르다. 먼저 남자를 살펴보자.
남자는 여자의 몸을 뒤에서 안아보는 것으로 처음 여자는 만난다. 아니, 이는 작가의 권고로 보아도 좋다. 여자를 만날 때는 여자를 뒤에서 조심스럽게 안아보는 것으로 만나보라는.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허용할 여자는 많지 않을 것이므로.
어쨌거나 한미의 작품 속에서 남자는 운이 좋았다. 여자가 뒤에서 자신을 안은 남자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를 그렇게 뒤에서 안아본 여자에게서 사랑을 감지한다. 작가는 그것을 <고요한 징후>라고 말한다. 이 고요한 징후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뒤에서의 포옹과는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다.
이번에 도예가의 공방을 드나들면서 알게 된 또다른 비밀 하나는 도예가가 작품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전에 스케치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스케치란 작품을 빗기 전에 종이에 미리 그려본다는 뜻이 아니라 최종 작품보다 작은 크기의 작품을 먼저 만들어보는 것을 가리킨다. 나의 눈엔 그것이 도예가 특유의 작품에 대한 스케치로 보였다.
원래 도예가 한미가 이 <고요한 징후>의 스케치를 했을 때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안고 있는 것은 같았지만 그때만 해도 남자는 여자의 허리에 자신의 팔을 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에 남자는 여자를 분명하게 안고 있었다. 그러나 본 작품을 하면서 남자는 그 팔을 거두었다. 남자가 그 팔을 거두자 그의 손은 허리 부분에 이르면서 마치 여자의 몸속으로 녹아든 듯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여자의 몸만 남았다.
나는 작가 한미에게 물었다. “정상적으로 보자면 남자의 팔이 여자의 허리를 안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작가는 답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했는데 그렇게 하니 남자의 손이 여자의 몸을 가려서 없애 버렸다.”
그 말은 내게 사랑은 여자를 안아보려는 욕망으로 시작되지만 그것이 사랑이 되려면 여자를 안는데 그치지 않고 여자를 드러내주는 조심스러운 동작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안으면서 여자를 욕망의 팔 속에 가두지 않고 동시에 그 욕망의 팔을 거두어 여자의 여자를 지켜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랑의 징후가 시작된다. 뒤에서 안은 남자의 팔이 그녀를 그의 욕망 속에 구속하는 팔이 아니라 그녀의 여자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도록 해주는 또다른 자유의 팔이란 것을 직감했을까. 그녀는 뒤의 남자에게 몸을 모두 맡기고 그녀를 드러내고 있었다.
카오스의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안아보는 것으로 고요한 사랑의 징후를 감지했다면 여자는 어떠했을까.
여자도 뒤에서 남자를 안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와는 다르다. 여자는 남자와는 달리 한 손을 남자의 가슴쪽으로 얹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가 남자의 마음이 있는 자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꿈꾸는 것은 남자의 몸을 얻는 것이라기보다 몸을 통하여 남자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남자는 손을 뒤로 보내 여자가 뒤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한미는 그 둘에게서 <완전한 소통>을 보았다고 했다. 작가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여자가 뒤에서 남자를 안을 때 그 자리엔 <완전한 소통>에 대한 꿈이 있다. 그 꿈은 여자에게 있어선 남자의 마음을 얻는 것이며, 남자에게 그 소통은 내 뒤에 내 여자가 있다는 확인이다.
뒤에서 몸을 안아보는 것으로 사랑의 징후와 어떤 소통의 꿈을 찾아낸 두 남녀는 드디어 서로를 마주한다.
마주한 두 연인은 이제 입을 맞춘다. 입을 맞추면서 아마도 둘은 서로에게 흘러들었을 것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입을 맞추면 무엇인가 서로 오고가게 된다. 입을 맞춘 두 연인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도예가 한미는 그렇게 하여 두 연인이 얻은 것이 <푸른 영혼>이라고 말한다. 푸른 영혼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도예가는 그 대답을 유약과 가마의 불에게 묻는다. 실제로 사랑이 그렇다. 사랑은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세상 속에서 뒹굴며 자기 색깔을 얻어간다. 몸으로 시작했지만 몸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얻어가는 것,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다만 그것이 도예가 한미에게선 한미가 그들의 몫으로 내준 유약과 가마의 불에서 푸른 색을 가졌던 것일뿐, 모든 사랑이 푸른 색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미가 유약과 불에게 그 대답을 물어 얻어낸 푸른 색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푸른 색은 생명의 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초록의 풀처럼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이 몸에 그치지 않고 영혼으로 채워질 때 그 자리에서 우리가 사랑을 볼 수 있다.
두 연인이 얻어낸 그 생명의 영혼은 이제 좀더 격렬해진다. 거의 직립으로 서서 포옹하고 입맞추던 연인은 그 격렬함을 밀어붙인다. 특히 남자가 여자를 밀어붙인다. 그 힘으로 여자의 몸이 기울어진다. 거의 누을 정도로.
서로 마주한 둘은, 뜨거운 포옹과 진한 입맞춤으론 푸른 영혼은 가질 수 있어도 그 영혼으로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몸을 기울여야 영혼이 서로에게 건너간다. 남자의 힘은 여자의 몸을 갖기 위한 몸짓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그녀의 영혼 속으로 건너가고 싶은 몸짓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몸의 기울어짐에서 <영혼의 기울기>를 엿본다.
몸을 기울여 상대의 영혼으로 흘러가고, 상대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 뒤는 무엇인가. 작가는 그것이 <마주침, 모든 것의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마주침의 순간, 이제 흉포하게 느껴질 정도로 여자를 밀어붙이며 여자를 기울였던 남자는 몸을 낮추어 여자를 안고 있으며 여자는 남자의 등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 삶을 짊어지고, 그의 등에 업히는 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등에 몸을 붙이지 않는다. 남자도 여자를 등에 업는다기 보다 여자의 허벅지를 안고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업혀있는 듯하면서도 알고 보면 또 서 있다. 둘은 업어주고 업힌 관계라기 보다 업어주고 업힌 관계와 서로 독립적으로 서 있는 관계 사이의 애매모호한 절충과 균형 사이로 서 있다. 남자는 여자를 안아준 것도 아니고 또 짊어진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어중간한 자세이고, 여자는 남자에게 안긴 것도 아니고 그의 등에 업힌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자세를 보인다. 여자는 남자의 등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나 아울러 서 있다. 둘 사이는 몸을 무너뜨려 서로 뜨겁게 뒹구는 사이가 아니라 긴장으로 서로를 지키고 있는 사이이다. 작가는 그러한 관계를 일러 드디어 서로가 서로를 마주한 사이가 된 것이며, 그것이 바로 사랑의 모든 것이라고 전한다. 나는 그것이 바로 삶이라고 고쳐 쓴다. 나를 모두 내주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나로 독립되지도 않고 의지하는 듯, 독립한 듯, 함께 하며 살아가는 삶이 그것일 것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서로 마주치며 살아간다. 한때 <푸른 영혼>으로 채색된 사랑을 가졌던 두 연인의 사랑은 이제는 짙은 구릿빛이다. 훨씬 강인해졌다는 느낌이다. 삶 속에서 살아남은 사랑은 아마도 그런 빛일 것이다.
한미는 그 마주침의 시절을 넘긴 연인은 이제 <물의 연인>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여자는 정말 물처럼 보인다. 특히 그녀의 머리결은 완연한 물결을 이룬다. 그때가 되면 남자는 물이된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 마치 잠들어 있는 듯하기도 하다.
왜 두 연인은 물의 연인이 된 것일까. 물은 뒤섞이면 서로를 구별할 수가 없다. 이 물과 저 물이 뒤섞이면 그 자리엔 그저 물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물의 연인이 되었다면 둘은 구별할 수 없는 하나가 되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물의 연인에게서 우리는 여전히 남자와 여자를 본다. 사랑은 하나 되려는 욕망이기도 하지만 서로를 지켜가는 욕망이기도 하다. 서로가 구별없이 하나로 뒤섞여 희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뒤섞이면서도 서로가 또 서로를 잃지 않으려는 긴장이 흐르는 자리에 물의 연인이 있다.
<물의 연인>에 이른 사랑의 길은 궁극적으로 <물결>이 된다. 나는 그 물결을 존재의 표현으로 이해를 했다. 존재의 표현이란 무용가의 춤 같은 것이다. 무용가가 존재라면 춤은 그 무용가가 이르고자 하는 표현의 궁극이다. 사랑하는 남녀가 물의 연인이 된 것은 존재의 궁극에 이른 것이지 그 존재의 사랑 표현이 궁극에 이른 것은 아니다. 춤을 추고 싶은 자가 무용가가 된 것은 존재의 양식을 갖춘 것일 뿐, 그 존재로 표현하고자 하는 세상의 궁극에 이른 것은 아니다. 아마도 무용가라는 존재가 그 존재를 표현하는 궁극에선 춤이 남을 것이다. 물의 연인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물의 연인이 꿈꾸는 사랑은 그 표현에 있어선 물결이 되고야 말 것이다.
그리하여 도예가 한미는 자신이 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을 물결로 마무리짓는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반쯤 묻고 잠들어 있는 듯하다. 모로 기댄 것과 반쯤 묻은 것은 완연히 다르다. 그것은 반쯤 여자에게 자신을 내준 끝에 도달한다. 그렇게 자신도 물이 되어 둘의 물결로 일렁이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3
보통 그림은 작가의 손에서 완성을 본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이 곧 작품을 완성하는 순간이다. 도예가의 경우에는 좀 다르다. 작가는 형상을 빚은 다음, 다시 그것의 색과 최종 완성을 유약과 불에게 묻는다. 그런 점에서 도예는 좀더 삶을 닮았다. 삶은 우리의 손에서 우리 손에 의해 완성된다기 보다 우리는 기본 형상만 빚을 뿐 세상의 환경으로부터 수많은 영향을 받아가며 변형되고 일그러진다. 그 때문인지 작가 한미가 도예 작품을 통하여 전하는 남녀의 사랑은 사랑에 대한 몽상적 꿈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나는 그의 작품을 접하고 있을 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삶의 유약 속에 잠기고 삶의 세파에 그을리며 영그는 사랑의 얘기를 듣는 듯했다. 그 사랑은 몸으로 시작되었지만 욕정에 갇히지 않고 영혼으로 진화되었고, 그 영혼은 서로에게 서로를 기울이며 흘러들었다. 그리고는 결국 삶 속에서 부대끼다 반복되는 삶으로 굳어지지 않고 그 끝자리에서 물결이 되어 일렁이고 있었다.
가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랑이 굳어져 우리의 숨을 막을 때면 더더욱 그렇다. 도예가 한미는 그때가 삶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아니라 사실은 물결로 일렁이는 사랑을 꿈꾸어야 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물의 사랑을 나누고 나면 또 우리는 서로를 짊어지고 세상과 삶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결로 일렁이는 사랑 앞에서 오늘 나도 문득 물이 되어 일렁거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시회는 다음의 일정으로 열린다
-전시회: 한미 도조전 『영혼의 기울기전』
-전시 기간: 2011년 11월 16일(수) – 21일(월) 오전 10시~ 저녁 7시
-전시 장소: 인사아트센터 4층 제2특별관
9 thoughts on “물결에 이른 사랑 – 한미 도조전 『영혼의 기울기전』”
재료나 크기가 나와 있진 않지만, 해제만 읽어도 작품 분위기와 작가의 작품세계를
슬쩍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중간중간 개인적인 이야기를 곁들이시니까 좀 더
이해하기 편하네요. 사진상으로는 물결, 마주침, 기울기 같은 작품들이 맘에 드는데요.^^
작가를 알고 있으니까 여러모로 좋더라구요.
궁금한 거 물어보고 작품 이해에 대한 실마리를 잡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내일 여섯 시에 인사동 들르시면 제가 반겨드릴께요.
오픈식을 한 시간 정도 하거든요.
와….*^___^* 동원님…
고마워요 이렇게 작품을 정말이지 풍경님 말씀처럼
새롭고, 깊게 이끌어 내주셨네요…
작은 도움이라니요..너무 과분하게 큰 도움을 받기만 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내일 전시장에서 뵈을께요!^^
그런데, 제가 팜플렛에 22일까지라고 했는데요
22일은 오전에 작품철수를 해서 실제적인 전시마감일은
21일까지에요..꼭 이렇게 덜렁거리며 실수를 해요..제가요 ㅠㅠ
팜플렛은 못고치고 위에 일정은 고쳤어요.
내일 반가운 얼굴들 얼굴 보겠네요.
오~
이거 참 엄청납니다.
도토리님 작품이 새롭게 보이네요.
이거 제가 한 200부 복사해서 가지고 갈게요. ㅎ
어머나… 풍경님 고마워요!^^ 내일 뵈을께요~
200부.. ㅋㅋ
전시회 전에 작품들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덕택 같아요.
심지어 갓 빚어진 작품도 함께 봤잖아요.
낼 봅시다요.
200부 적어요? 300부 해야될려나요…..
블로그에서 무한제공.
아무리 봐도 닳지 않습니다. ㅋㅋ
공방 둘러보고 가졌던 시간들이 자꾸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