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속을 거닐며, 그리고 짐짓 남인양 빈 충만의 공간에 서서 – 정정심의 시

Photo by Kim Dong Won
2002년 9월 12일
정정심과 나의 고향인 영월 문곡리 풍경

1. 정정심과 정심이
내게 있어 세상의 모든 시인은 그들의 이름 석자로 마주하게 되며, 그런 관례는 나에게 있어 지극히 자연스럽다. 때문에 내게 있어 황동규는 황동규이며, 오규원은 오규원이다. 인연이 좀더 깊어 시인과의 사이에 선후배의 친분이 끼어들고, 그리하여 시인과 좀더 남다르게 맺어진 경우에도 그렇듯 이름 석자를 불러 시인을 마주하는 내 관례의 자연스러움은 흔들리는 법이 없다. 그래서 내게 있어 나의 후배 김점용은 그냥 김점용이며, 한명희는 한명희이다.
그러나 그 이름 석자의 관례가 아주 부자연스러워지는 시인이 한 명 있다. 내게 있어 그는 그러한 경우의 유일한 예이다. 그 유일한 자리에서 나를 마주하는 시인 정정심은 때문에 정정심이 아니라 언제나 나에겐 정심이이다.
그는 나에게 영원히 정심이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같은 마을에서 같은 해에 함께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함께 성장했다. 나는 초등학교 6년 동안 그와 함께 같은 반에서 머리를 맞대고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뒤 중학교 3년 동안의 세월 속에서도 우리는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유년 시절, 내게 각인된 그의 이름, 정심이는 그가 시인이 되고서도 여전히 정심이였다. 그리고 그 자연스런 이름 정심이는 우리 둘이 40의 나이를 넘긴 지금도 여전하기만 하다. 바로 그 때문에 시인을 마주할 때 내가 늘 건너편에 세워두고 부르는 그 이름 석자의 호칭이 그에 대해선 부자연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나의 정심이가 아니라, 정정심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시를 돌아보는 나의 행보를 둘로 나누려 한다. 그 첫번째 길에서 나는 내가 늘 부르던 자연스런 이름, 바로 정심이의 시를 들여다 볼 것이며, 다음 길에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마주하게될 정정심의 시를 둘러보게될 것이다.

2. 정심이의 추억 속에 서서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일상 언어는 현실의 경계 안쪽으로 갇혀있다.
가령 내가 지금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고 해보자. 건너편의 신호등엔 지금 빨간불이 들어와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옆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일 것이다. 나의 시선은 건너편 신호등의 빨간 불빛으로 향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몇 사람의 시선이 한데 엮여 그 빨간 불빛 속에 모아져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약삭 빠른 사람이라면 그의 시선은 오른쪽이나 왼쪽의 자동차용 신호로 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동차용 신호등의 불빛과 보행자용의 신호가 밀접하게 연계되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동차용 신호등이 점멸하면, 이미 보도로 한발을 내려놓고 누구보다 빨리 걸음을 옮겨갈 준비를 시작한다. 그러다 파란 불이 들어온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한쪽으로 눈을 부라린 자동차들이 멈춰서고, 한쪽으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혹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차들이 급한 질주를 시작한다. 우리는 횡단보도를 알리기 위하여 하얗게 빗금으로 페인트칠을 해놓은 그 구분된 지역을 걸어 바쁘게 건너편으로 건너간다.
나는 아주 일상적인 언어로 횡단보도의 풍경을 얘기했다. 아마도 이렇듯 일상적 언어 속에 담아놓은 풍경은 어느 횡단 보도 앞에서나 거의 마찬가지일 것이다. 횡단보도는 여러 곳에 널려 있으나 이렇듯 일상적 언어로 옮겨놓으면 거의가 똑같아서 거기가 여기이고, 여기가 거기이다. 언제나 그곳을 말하는 언어는 하얀 빗금으로 그어진 횡단보도 표시 지역과 신호등으로 제한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일상 언어가 현실의 경계 안쪽으로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 경계를 넘어가면 횡단보도를 말하는 언어는 소통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여기 기적같은 언어가 있다. 그 언어는 현실의 경계를 넘어간다. 그러면서도 소통의 기능을 상실하기는 커녕, 더 넓은 소통의 지평을 열어놓는다. 바로 시인의 언어이다. 시인이 대상을 언어로 버무려 우리 앞에 내놓는 순간, 그 언어는, 언어를 가두고 있던 현실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평으로 우리를 이끈다. 정정심의 경우에도, 시의 언어가 펼치는 그 기적은 예외가 아니다. 모두, 그의 안내를 따라 횡단보도로 다시 서보자.

푸른등이 켜지고
나는 강을 건넌다
하얗게 이는
물살의 빗금을 엮어 타고서.

발밑으로 자동차 엔진소리
혼곤하게 흘러가고
경적이 울릴때마다
불현 듯
은행잎이 지고 있다
강 건너.
─「횡단보도」에서

횡단보도는 강이 된다. 그 순간 우리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횡단보도의 구분선이 아니라 하얀 물살의 빗금을 타고 강을 건널 수 있다. 길 건너편의 은행나무가 낙옆을 떨어뜨릴 때 우리는 강 건너에서 지고 있는 은행잎의 서정적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정정심의 시 한 구절에서 시인의 언어가 현실의 경계를 넘어간다는 말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가 언어로 이루어지는 관계로 우리는 동시에 시를 마주했을 때 언어의 경계를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그 점은 내가 대부분의 시를 읽을 때 부딪치는 한계이다. 그 언어의 경계를 넘어갈 수 있다면 나는 아마도 시어가 처음 발원했던 진원지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초인적 능력은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상상력을 통하여 그 진원지를 짐작해볼 뿐이다.
하지만 때로 그 진원지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질 때가 있다. 다른 시인들의 경우, 그런 행운은 내게 없으나, 내가 마주한 시인이 정심이 일 때, 그런 행운은 바로 나의 몫이 된다. 나는 그와 한동네에서 크고 자란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의 시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부딪칠 언어의 경계를, 나는 때로 손쉽게 넘어갈 수 있다. 그 한 예를 보자.

문곡리 뒷산
굽은 산허리를 짚어온 바람결에
어머니 말씀 나직나직 잠들어 있다.
─「문곡리 소묘」에서

꿈을 꾸었네

잠결에도
하얗게 떠 오르던
문곡리(文谷里)
─「만추」에서

시 속에선 단 세글자로 뭉뚱그려져 있지만 문곡리란 말이 내게 일으키는 파장은 상당히 넓고도 깊다. 그곳은 행정구역 상으로 보면 이제 동강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사람 누구에게나 낯익은 이름이 되어버린 영월읍에서 북쪽으로 40여리 가량 떨어져 있는 시골 마을이다. 차로는 영월에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강원도의 산골이어서 우리 마을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을의 집들은 네 곳으로 분산되어 몇채씩 서로 모여있었다. 마을의 중심부는 마을의 가운데를 흐르던 개천에 가까이 붙어있었고 우리는 그곳을 장터거리라고 불렀다. 물론 그곳에서 장이 서는 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농촌 마을이 대개 그렇듯이 먹는 것을 거의 모두 자급자족하는 그 산골 마을에 장이란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어떤 연유인지 마을의 한가운데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모여있는 그 집들의 거리를 우리는 장터거리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와 함께 개천의 건너 앞산의 아래쪽으로 몇 채의 집들이 모여있었고, 우리에게 그곳은 음달말이었다. 항상 음달이 져 있는 마을이란 뜻이었으리라. 우리 마을에선 두 개의 개천이 합쳐 하나가 되며 마을의 가운데를 가로 질러 흘러가고 있었는데, 북쪽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천의 건너로 그곳 역시 산 아래쪽으로 몇채의 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은 우리에게 울병똘이었다. 나는 그 말의 뜻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그곳에서 좀더 올라간 곳에도 집이 한채 있었으며, 그곳은 모랑가지였는데 그 이름 역시 나는 뜻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정심이와 나는 그 마을에서 뒷산 자락의 아래쪽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몇채의 집들 가운데서 살았다. 어찌된 일인지 그 몇채의 집들이 자리잡은 뒷산 아래쪽에 대해선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니까 문곡리는 가운데의 장터거리 마을과 남쪽의 음달말, 동쪽의 울병똘과 모랑가지, 그리고 정심이와 내가 살던 뒷산 아래쪽의 가구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문곡리가 등에 업고 있었던 뒷산은 내게 아주 특별한 곳이었다. 얕으막한 그 산으로 오르는 길은 세 갈래였다. 그중 한 갈래는 정심이네 집의 바로 옆에 있던 윤식이네 집 뒤쪽에서 시작되고 있었고, 정심이네 집의 또다른 옆쪽으로 놓여있던 커다란 윤식이네 밭의 옆으로 또 하나의 길이 놓여있었다. 또 다른 하나의 길은 보통은 올라가는 길이라기 보다 내려오는 길이었다. 마을에서 올라간 길이 산을 가로질러 가다가 다시 내려서면 그때부터가 그 길이었다. 그 길이 아래쪽으로 다 내려오면 그곳엔 이제 마을을 빠져나가고 있는 개천의 끝부분이 가로놓여 있었다. 하지만 산을 오를 때 그 세 길은 내게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길이 아니었다. 나는 오늘은 이곳으로, 내일은 저곳으로, 마음을 끌어당기는 길의 자장을 좇아 그때그때 아무 길로나 산을 올라갔다.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혼자 산을 올라 여기 저기를 쏘다니며 바람을 호흡하고 새들이나 나무들과 대화하다 저물녘에나 산을 내려오곤 했다.
언어의 경계로 보면 문곡리의 그 뒷산을 오르기는 매우 어렵다. 어떤 사람이 정심이의 시에 깊은 관심을 가져 문곡리를 직접 방문하는 경우에도 그 문곡리의 뒷산은 우리가 살던 시절과는 크게 달라서 저것이 시 속의 그 뒷산이구나 하는 정도의 감회는 가질 수 있어도 내가 언어의 경계를 넘어가서 맛보는 그 옛시절의 지평 속에 서기는 어렵다. 아울러 세월의 흐름을 타면서 현실적으로도 그 산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잦은 걸음 앞에 우리의 무게를 모두 받아준 흔적으로 그 산에 아스라이 흔들리는 길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길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길은 지금은 예전의 주인이었던 풀과 나무들에게 자리를 내어준지 오래이다. 고향을 내려갈 때마다 나는 그 산을 다시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나의 키를 넘는 무성한 높이로 앞을 막는 그 풀을 헤쳐갈 수가 없어 번번히 먼 발치에서 시선만 산꼭대기에 얹어두었다가 돌아와야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심이의 시 속에서 잠깐 언급되고 지나가는 그 문곡리의 뒷산은 지금의 뒷산이 아니라 그 옛날 우리들의 뒷산이다. 그런 측면에서 언어의 경계를 넘어 그 뒷산의 길을 가는 행운은 내게나 주어지는 유일한 것임에 틀림없다. 언어의 경계를 넘어갈 때 그렇듯 우리는 짧은 시 구절 하나에서도 남다른 행복에 젖을 수 있다. 하지만 정심이의 시 가운데는 내가 한 구절로 잠깐 스치는 것이 아니라 내내 언어의 경계를 넘어 그 속을 하염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시 한 편이 있다. 나는 그의 「추억」 속에서 그 행복한 공간에 다시 선다.

자욱한 먼지 저희끼리 끓어 오르다 길을 나눠 헤어지는 삼거리 갈림길에 낡은 제무시 트럭 한 대 탄광쪽으로 달아나곤 하였다. 뿌리도 터전도 다 버리고 속살을 드러낸 채 실려가던 목재들 무참하게 잘린 뼈마디가 굵은 동그라미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지난날. 밤이면 지서앞 넓은 마당에 달빛처럼 아이들 우우 몰려나와 윤식이네 옥수수밭. 바람이 서걱대는 옥수수 대궁에 어둠이 열리는 소리를 숨죽이며 듣곤 하였다. 침묵의 갈피마다 은밀하게 숨던 금순이 동원이 영숙이들. 어쩌면 그렇게 이름자에 켜둔 불빛조차 남김 없이 지우는지. 전신주에 이마를 대고 어둠보다 두렵게 달려드는 외로움을 세고 있었다 나는. 길게 누운 망루의 그림자에 올라가 못 찾겠다 꾀꼬리 서러워 목이 메는 싸이렌을 울리곤 하였다.
─「추억」 전문

다시금 언어의 경계를 넘어가보면 그와 내가, 그러니까 정심이와 내가 자랄 때 우리의 고향 문곡리는 아직 모든 도로가 비포장 상태였다. 때문에 자동차가 한 대 지나가면 길에는 뿌옇게 먼지가 끓어올랐다. 문곡리는 정선과 평창, 그리고 영월로 이어지는 길이 모이는 자리여서 길은 우리의 고향에서 세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곳에서 정선 방향으로 5리 정도를 올라가면 마차가 있었고, 지금은 폐광이 되었지만 그곳엔 한 때 엄청난 사람들이 북적이던 탄광촌이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우리의 어릴 적에도 그 탄광은 있었다. 그 때문에 어쩌다 홍수라도 나면 대부분의 개울이 황토색 물로 싯누런 빛깔이었지만, 마차쪽의 탄광에서 내려오는 물은 시커먼 색이었다. 마차엔 우리들이 접산이라고 불렀던 높은 산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곳에선 벌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종종 벌목된 나무들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로 사라져 갔다. 그때 우리들에게 트럭이란 말은 없었다. 세상의 모든 트럭은 우리에게 제무시였다. 그 제무시가 GMC, 그러니까 미국 굴지의 자동차 회사인 제너럴 모터스의 영문 약자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아주 오랜 후의 일이었다.
그 삼거리엔 지서가 있었다. 정확히 그것은 지서가 아니라 지서 건물이었고, 실제로는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탄광촌이 번성하면서 지서는 마차로 이전을 했고, 그때부터 그 건물은 지서가 아니라 농협의 창고로 운명을 바꾸었다. 때문에 밤이 오면 그 지서 건물은 불을 밝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동네 사람들의 평온한 잠을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과 똑같이 눈을 감고 어둠 속에 시커멓게 드러누워 버렸다. 바로 그 때문에 지서 건물 앞의 넓은 공터는 우리들의 놀이터가 될 수 있었다.
그 지서 앞의 공터엔, 도로 가까이 나무로 만든 망루 하나가 서 있었다. 나는 그곳을 몇번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부실한지, 올라갈 때도 흔들흔들 흔들거렸고, 올라가서도 그곳을 올라간 기쁨을 환호할 수 없었다. 갑자기 망루가 내려앉지나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정상을 정복한 순간 나를 감쌌고 그래서 조심스럽게 몸을 사려야했으며, 아래로 내려와선 안도의 숨을 내쉬어야 했다. 그곳은 무엇을 내다보며 감시하기 위한 망루가 아니었다. 그 꼭대기엔 싸이렌이 하나 덩그러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망루는 김신조라는 이름을 우리에게 각인시킨 이북의 무장공비 사건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 사건의 이후로 무장공비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에게 그 비상 사태를 알린다는 목적으로 망루는 들어섰고, 그 위에 싸이렌이 놓이게 되었다. 그 망루는 우리가 숨바꼭질을 하며 놀 때, 항상 술래가 머리를 맞대고 아이들이 숨는 동안 열이나 스물까지를 세던 곳이었다.
삼거리에서 마주보면 정심이네 집을 기점으로 우리 집은 서너 집 건너 아래쪽에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윤식이네 집이 있었다. 정심이네 집의 바로 뒤로는 커다란 밭이 놓여있었으며, 그 밭은 윤식이네 밭이었다. 정심이네 집의 맞은편엔 우리가 6년 동안 같은 반으로 부대낀 문곡초등학교가 있었다. 어느 시골이나 다 그렇겠지만 숨바꼭질을 할 때 그 어둠 속에 숨을 곳은 지천이었고, 때문에 한번 술래는 어지간해선 그 술래의 수렁을 빠져나오기 어려웠다. 게다가 어떤 녀석은 저희집 방으로 기어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는 경우도 있어서 그런 녀석을 찾아내기란 정말 어려운 노릇이었다. 결국 나중에 우리는 모두가 술래가 되어 그 녀석의 흔적을 뒤지며 어둠 속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그러다 결국 우리는 그 녀석의 집에 도달했으며, 방에서 나오는 녀석에게 “야, 너 왜 집에 와 있어?”라는 말을 부라리곤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어릴 적 그곳에서 숨바꼭질을 했으며, 나는 감쪽같이 몸을 숨기던 그 많은 정심이의 동원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이 언어의 경계 안쪽에서 한 시인이 그려내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맛보고 음미할 때 나는 그 속을 거닌다. 그때 내가 누리는 행복은 그가 나의 정심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시의 속을 거닐며 행복한 한 편으로 이제는 그 흔적들이 사라진 세월의 흐름 뒤에서 가슴 한켠이 싸하게 울리는 아픔을 함께 느낀다.

3. 짐짓 다른 사람처럼
하지만 시의 속을 거닐 수 있는 행복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정심이는 없을 것으며, 내게 황동규나 오규원이 있듯이 그들에겐 시인 정정심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정심이의 추억 속을 거닐던 나의 행보를 거두어 들이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짐짓 남인양 그의 시를 마주하고 앉는다.
그렇게 마주앉으면 우선 정정심에게서 우리들은 인연으로 얽힌 상처를 보게 된다.

밀뱀같아
말은.

나른하게 기어 다닌단다.
싱싱하게 뛰노는 서로의 심장 내벽을 물기도 하지
흔적도 없이 깊고 큰 상처
아물지 않는단다.
─「문곡리 소묘」에서

그대생각.
베어내도 베어내도 한길씩 자라나네.
질긴 밧줄인연 중심에서 마주치네
매듭으로 거듭난 상처
오늘도 풀고 있네. 풀리지 않네.
─「내관 1」에서

그 상처의 연원을 더듬다 보면 우리들은 그것이 이혼의 상처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에 도달하게 된다.

목소리도 조그맣게
낮은 포복으로 기어온 이혼생활 다섯해
─「건망증」에서

그에 더 얹어 그는 몸도 성치 않다. 신장이 안 좋았던지 그는 동생의 신장을 이식받았다.

신체의 장부를 오행(五行)으로나눌 때
신장(腎臟)은 수(水)자리라고 하지요. 우리
몸의 원천이 되는 깊은 샘물이라고 하든가요. 내게 숨차게 맑은 물길을 나누어 준 친구가 있습니다. 그녀를 나는 아우라고 부르지요. 내몸속에서 따뜻하게 나를 지키는 그녀의 영혼에게…
─「물길 옮기기」에서

이혼한 여자라는 사회적 꼬리표와 몸의 건강으로 인하여 정정심이 감당해야 했을 삶의 힘겨움이 보통 이상이었을 것이란 점은 누구에게나 짐작이 간다. 그의 시 행간에서 우리는 그가 겪어야 했던 삶의 허망함과 힘겨움을 접할 수 있다.

브레이크 고장난
십일톤 트럭을 탄것 같앴어.
적재함 가득히
잡을수 없는 모래세월
오래오래
새고 있었지.
아슬아슬한 꿈길
벼랑에서
담담하게 백기로 나부끼던 사랑
─「정물화」에서

깊이를 모르는 물 웅덩이 곳곳에 있어 깜빡 정신을 놓으면 길고 긴 수초들 어느틈에 내 영혼을 휘 감고 가위를 누르더라.
─「산다는 것은」에서

대체적으로 그것이 삶의 전형적인 모습인지 모른다. 삶이란 아름답고 즐거운 구석보다는 그렇게 절망적이고 힘겨우며, 또 구차함으로 직조되어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서로 정분을 나누며 따뜻한 마음으로 어울려 살고 있다기 보다 “어디서나 승부를 걸”어야 하는 각박한 ‘세상’(「민경이 신문찢는 소리」)에서 살고 있다.
물론 그 세상에도 삶의 힘겨움을 달래주는 위안은 있다. 가령 “지친 이마를 닦으며 집으로 가는 길”에 시인이 “비가 내리”는 여의도의 “라이프 상가 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듣는 “이동원의 사랑”(「여의도에서」)이 그 중의 하나이고, 셋째 동생의 딸로 짐작되는 민경이가 “이모오~”라고 “적요를 길게 쪼개며” 시인의 “가슴으로 튀어 들어”(「민경이 신문찢는 소리」)오는 순간이 또 그렇다.
정정심은 그렇게 바깥의 위안에 슬쩍슬쩍 기대는 한편으로 그의 내부에서도 그 힘겨운 현실에 맞서는 방법을 찾아나간다. 현실을 현실의 잣대로 맞설 때 우리들이 부딪치는 갖가지 문제들은 그 해결의 전망이 밝지 않다. 현실의 잣대로 보면 대부분의 문제는 무엇인가가 채워져야 이루어지는데 그렇듯 채우고 싶다는 욕망은 현실에 대한 집착을 낳고, 그 집착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으면서 우리들을 더욱 힘겹게 만든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집착 아래 눌려간다. 정정심은 목욕탕에서 “때를 닦는” 자신의 모습을 통하여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때를 닦는다.
엉겁결에 일어서는 이태리 타월 팍팍한 성질과 마주서서.
손길 닿는 곳 마다 수생애의 미련 참담하게 밀리고 있다.
─「소멸의 노래」에서

나는 이 시에서 그가 말하는 “수생애의 미련”을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집착으로 읽었다. 그 집착으로 인하여 우리는 일반적으로 더더욱 현실 아래 깊이 속박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집착은 해결의 길이 되지 못한다. 정정심이 선택한 해결의 길은 바로 그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가을이 시작 되면서 나는 내게 소용이 닿지 않는
모든 것들을 놓아 보내기 시작 했습니다.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면서 해가 바뀔 때 마다
장농에서 서랍장으로 옮겨만 놓던 옷가지들.
사용할 기약도 없이 작은함 가득히 모아 두었던 자잘한 장식들.
오래전에 감상했던 전시회 또는 음악회 프로그램 지나간 사랑같은.
신지도 않고 오래되어 유행이 지난 앞이 뾰족한 하이힐.
기억 안에서 언제나 소외되어 버림 받지 않으려 발버둥 치던
더 많은 그것과 무엇들.
너무나 어리석어 서른 몇해
허전한 가슴속 보석이라도 되는냥 곳곳에 쌓아 두었던
오만과 집착 쓸데없이 발을 늘이던 망상 헛되고 헛된.
내가 보낸것이 버린다는 허울뿐 이였음을 안다는 듯이
남아 있는 것이야 말로 비워내야 하는 형식임을 안다는 듯이.
─「쪽지편지」에서

이제 그만 놓아 주어라 얘야,
어디든 흘러가서 한곳에 닿지 않겠니
─「내관 2」에서

그렇게 놓아주는 순간, 그 자리가 빌 것 같지만 우리의 일반적 예상과 달리 그 자리는 오히려 충만의 자리가 된다. 그 충만의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차암내
비어서야 아름다웠어
산다는건.
─「정물화」에서

아마도 사람들은 지금쯤 눈치 채었을 것이다. 그의 시에서 우리들이 만나는 아름다움이 그렇게 현실적 집착을 버린 자리에서 얻어진 충만이란 것을. 그 충만의 한 예를 들추어보면 그의 새벽이 있다. 아마도 우리들이 현실의 잣대에 매달려 집착하고 버리지 못할 때 아직 앞이 안보이는 어둠이 가로막고 있을 그 미명의 시각에 그는 사실은 그 속에 어둠이 살아 있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비가 내리고 있었네
祈禱를 마치고 돌아오는
큰 길에.

바람의 그물코에서
얇게 저민 생선회처럼
비린내가 났었네

너 살아서 파닥이고 있었구나
어둠.

자동차가 지날때마다
불빛에 반짝이던
어둠의 푸른비늘.

우산 살을 타고 흐르는
은빛등을 핥고 있었지
엷은 빗소리
깊고 純情한 그들의 內面.

문득
흑백의 낱장으로
서럽게 떠 올라오고 있었네
그대

외로움이 벗겨지는
가려운 심장 언저리.
─「새벽」 전문

그렇게 빈자리의 충만에 눈뜨는 순간, 심장은 그간의 외로움을 벗고, 생살이 돋기 시작한다. 그 생살이 돋는 순간의 간지러움은 그냥 상상만으로도 우리를 들뜨게 하지 않는가. 정정심의 시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코트깃을 내리”고 “이월을 품고 있”는 조용한 ‘공원길’의 “아름드리 전나무”(「안개」) 곁에 서 보거나, 어느 한적한 시골녘의 사월에 “가만가만 속얘기를 내비치”는 ‘밭이랑’에 서서 “꽃잎을 주워들며 고요” (「문곡리 소묘」)속에 잠겨보아도 우리는 똑같은 충만의 순간에 한동안 몸을 묻어둘 수 있다. 아마도 그 빈 충만은 상처받고, 또 삶의 힘겨움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시의 미덕이자 매력이다. 짐짓 남인양 걸음한 그의 시 속에서 나는 그렇게 그 빈 충만의 위안에 어깨를 기대고 잠시 세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4. 다시 정심이에게
나는 고향에 내려갔을 때면 거의 예외없이 정심이네 집을 찾았다. 번번히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하고 그냥 올라오곤 했다. 나도 자주 고향으로 걸음하는 편이 아니었던 데다가 그도 항상 집에 있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는 자주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다 그를 만나면 그때마다 내가 예외없이 묻는 얘기는 요즘은 글은 좀 쓰니라는 것이었다. 그때면 정심이는 글을 생각할 정도로 몸의 상태가 여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의 건강은 그냥 겉으로 보기에도 매우 안좋아 보였다. 아울러 그는 자신은 모든 것을 비워내는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으며, 그가 비워내려고 하는 것엔 내가 궁금해하는 그의 시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나는 한편으로 그의 건강이 염려되면서도, 또 한편으론 그렇게 비워지고 있는 그의 시가 안타까웠다.
나의 머리 속 한켠으로 그때마다 지나간 생각은 쓴다는 것이 곧 비운다는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쓴다가 무엇을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무엇을 비우는 행위가 되는 것은 순전히 쓰는 자에게 달린 것이 아닐까. 그 역설의 미학이 바로 우리를 문학으로 끌어당기는 매력은 아닐까. 또 정심이의 시 자체가 그것의 증거는 아닐까.
나는 정심이의 시들을 찬찬히 읽으며, 40여편의 시들 사이 사이가 듬성듬성 비어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 사이사이를 채우는 행위가, 다시 말하여 그가 다시 시를 쓰는 행위가 무엇을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그를 비우는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가 비울 때, 나는 그 자리에서 비움의 충만을 배울 수 있었으며, 그것이 그의 시를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행복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를 만날 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그 기대 끝에 다시금 서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내 욕심을 한 켠으로 밀어놓고 싶다. 그리고 대신 그의 건강을 비는 내 마음을 마지막 자리에 새겨놓는다.
(2002년 12월)

10 thoughts on “시의 속을 거닐며, 그리고 짐짓 남인양 빈 충만의 공간에 서서 – 정정심의 시

  1. 안녕하세요?? 정심언니 바로아래동생 정미~~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문득 언니이름 한번 올려봤더니..반갑게도 동원오빠 블로그에 언니에관한 글이 실려있네요. 언니 아직투병중이지만 열심이 잘살구 있어요.
    울언니 이케 기억하구 추억해주셔서 넘 감사하구요 ~ 언니게 안부 전할게요^^*
    블로구 둘러보구 가여..가끔 들를게요

    1. 아니, 이런 반가울데가.
      정미, 정옥이 다 기억나지.
      정미는 엄청 미인이었는데.
      그리고 맨 아래로 딸하나 아들 하나 또 있었는데.
      이 글은 언니는 알고 있어.
      오래 전 책낸다고 해서 내가 써서 건넸는데
      그 뒤로 소식이 끊어져서 그냥 내 블로그에 올려놓았어.
      안부 전해주고 항상 건강하길 빌께.
      가능하면 연락할 수 있게 요기 밑에 댓글로 전화번호좀 남겨주렴.
      secret mode라는 부분에 체크하면 비밀리에 남길 수 있단다.

  2. 만족스럽진 않지만, 기별 고맙습니다.
    정심씨랑은 아주 옛날 동인활동도 했더랬습니다.
    저는 시와 에세이를 합니다. 오랜 세월 절필했었지만 등단 연조로는 29년.
    내려가진 않지만 주천사람입니다. 서울에서 정심씨를 본 지가 …어림잡아 15년은 된듯. 동갑내기입니다.
    알아보려고 노력은 했습니다만, 쉽지않더군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건필하십시오.

    1. 주천 좋은 곳이죠.
      이 글을 쓸 때는 서로 연락을 했었는데 그때 이후로 연락이 끊어져 버렸어요.
      매년 고향에서 동창회가 열리는데 한번도 얼굴봤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서 고향 친구들을 만나도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문과 정심이에 대한 관심, 고맙습니다.

    1. 저도 얼굴보지 못한지가 한참 된지라 소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고향에 내려가본지도 한참 되었구요.
      항상 탁자밑으로 낮게 깔리듯 얘기했던 정심이 목소리가 그립군요.

  3. 언어의 경계…
    현실의 언어에서 한발자국 건너면 무궁무진 펼쳐지는
    언어의 광장을 읽습니다.
    아름다운 시인의 아름다운 친구의 언어가
    오늘 마음을 적셔오네요.

    시를 쓰는 행위가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행간 행간마다 시인의 마음을 비우는 행위…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

    1. 이미 고등학교 때 강원일보에 시가 뽑혀 신문에 나면서 시인이 된 친구예요.
      같이 자란 친구가 시인이란 건 아주 특별한 혜택인 거 같습니다.

  4. 평창~ 이효셕님의 메밀꽃 향기가 문곡리까지 퍼져서
    아름다운 시인을 낳은 듯 하네요…
    또한 같이 술래잡기 하신 동원님도요
    비움의 충만감…
    이 봄에 그 역설의 미학에…꽃이 피는 모습에서도 꽃비 아래 저를 상상해봐요~

    시도 해석도 넘 향기로와요~!!!

    1. 오래 소식이 끊긴 상태예요.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네요.
      동생 전화 번호가 어디에 있었는데 그것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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