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의 눈에 세상은 항상 자명해 보인다. 낯이 익을수록 더더욱 그렇다.
가령 나의 경우 마당으로 나서면 매년 오뉴월에 붉은 장미를 가득 채워주는 넝쿨장미가 있고, 그 왼쪽으로는 배나무가 항상 동쪽을 살피고 있으며, 오른쪽엔 은행나무와 감나무가 눈앞을 가로막은 높은 아파트 너머로 시선을 두고 서쪽 하늘을 살피고 있다. 하지만 눈에 익은 그 풍경이 과연 그렇게 자명한 것일까. 혹시 내 눈은 눈에 익은 그 풍경의 익숙함에 묶여 그 풍경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는 혹시 세상을 내 눈의 익숙함 속에 단단히 묶어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규원은 그의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에서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직관에 의해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명시적인, 누군가가 정해주는 그런 해답을 찾는 것”이 우리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대지의 폭죽인 봄의 꽃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어도 ‘봄의 꽃들이 어제보다 그늘을 조금 더 넓힌다’는 사실적 현상은 이해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앞의 것은 이해의 통로가 확정되어 있고, 그러니까 의미가 정해져 있고, 뒤의 것은 그 의미가 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입니다…
—오규원, 『날이미지와 시』, p.111
오규원의 얘기는 말을 바꾸면, 우리들이 보여주는대로, 혹은 보여지는대로 보고 읽는 데는 아주 익숙하지만 세상을 내 눈으로 보고 읽는 데는 매우 서툴다는 얘기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시가 세상의 의미를 제한하고 확정하며 굳어있기보다 그냥 살아서 사람들이 그 앞에 설 때마다 자신의 시와 손을 잡고 세상을 그들 자신의 눈으로 보면서 갈 수 있게 해주는 동반자가 되길 바랬다. 그것이 그가 꿈꾼 날이미지의 시였다.
2. 나는 언젠가 그가 길에 관해 얘기한 두 편의 시를 들고 길에 한번 서보고 싶었다. 그럼 그가 말한 날이미지의 세계를 몸으로 직접 호흡할 수 있을 듯 싶었다. 몇번을 미루다 나는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팔당의 예봉산으로 가는 길에 그의 시와 손을 잡고 산으로 함께 나섰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는 산이어서 산을 오르는 그곳의 등산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낯익은 길이다. 지하철이 팔당역까지 연장이 된 뒤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산을 찾고 있다. 다른 산과 마찬가지로 그곳의 등산로도 길인가 싶어 가다보면 곧잘 끊기곤 하는 것은 예외가 아니다. 처음 가는 사람은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가 곧잘 길을 돌아나오곤 한다. 길은 경치가 좋은 곳으로 잠시 샜다가 다시 산의 정상으로 방향을 잡곤 한다. 그렇게 예봉산의 산길은 여러 곳이 끊겨있지만 또 끊긴 길을 추스려 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간다.
길을 따라 산으로 오르다 보면 길 옆으로 나무가 늘어서 있고, 바위가 버티고 있기도 하며, 또 때로는 굴러떨어진 바위가 길의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앉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산에 갈 때마다 수없이 보는 자명한 산길의 풍경이다. 그 길의 풍경이 실제로는 굳어있는 풍경이란 사실은 손잡고 함께 간 오규원의 시를 그 길에 눕혀보면 곧바로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그 길에 눕더니 내 앞으로 길을 펼쳐들었다.
여러 곳이 끊겼어도
길은 길이어서
나무는 비켜서고
바위는 물러앉고
굴러 내린 돌은 그러나
길이 버리지 못하고
들고 있다
—오규원, 「산과 길」 전문
아마 사람들 중에는 표현이 참 남다르다는 선에서 이 시에 대한 이해를 구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보다는 그동안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굳어있던 우리의 길과 달리 오규원의 시가 펼친 길에선 길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나무도 살아있고, 바위도 살아있다. 이른바 그가 말한 살아있는 이미지, 바로 날이미지의 세상이다. 그리고 그 날이미지의 세상은 우리들에게 곧바로 전염이 된다. 그 날이미지에 전염이 되고 나면 세상은 그동안과는 다르게 재편이 된다. 예를 들어 산길을 오르다 길옆에 앉아 잠깐 휴식을 취하면 길은 자신은 조금더 가보겠다며 저만치 앞서 가선 그곳에 앉아 우리를 기다린다. 물론 기다리는 동안 가만히 있지는 않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와 무슨 얘기인가를 수근거린다. 평상시 그 길은 길을 따라 오르던 길이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날이미지의 세상에 섰을 때 나는 길과 함께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건 인간을 중심으로 편재된 세상, 그러니까 인간만 살아있고 나머지는 모두 굳어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 길도 동반자가 되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광화문의 교보문고에 나가게 되었다. 출판사를 하고 있어 가끔 책주문이 들어오면 책을 납품하러 교보에 가곤 한다. 책을 배달하고 남은 오후의 시간이 너무 많아 나는 여기저기 갈 곳을 재보다가 결국은 북한산으로 걸음하게 되었다. 내가 택한 곳은 우이동 계곡에서 백운대로 오르는 산길이다. 결혼 초에 미아리에서 살았던 관계로 자주 찾았던 길이다. 예봉산의 산길과 달리 돌과 바위가 유난히 많은 길이다. 땅에 묻힌 커다란 바위 하나가 아예 통째로 길을 이룬 곳도 많다. 며칠 전 오규원의 시와 함께 걸었던 예봉산의 산길에서 날이미지의 세상에 전염된 여파 때문인지 그 바위는 그냥 바위로 보이지 않았다. 그 커다란 바위는 땅에 엎드려 등에 길을 짊어지고 내게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나는 바위가 등에 짊어지고 열어준 길을 밟고 북한산 백운대로 올랐다. 오르다 길 옆의 단풍에 홀려 발걸음을 옆으로 떼려 하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다시 내 앞으로 엎드려 길을 열어준다. 아주 짧은 길이다. 오르다 다리가 아파 좀 쉬려고 하면 바위는 내 엉덩이 밑으로 곧장 의자 하나를 내주었다. 아니 내 느낌과 달리 바위는 엎드려 있는게 아니라 사실은 누워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품에 길을 안고, 또 그 품에 의자를 안고. 그리고 자기 품의 그 길을, 그 의자를 내 발앞에, 또는 내 엉덩이 밑으로 잠깐 내준 것인지도 모른다. 북한산을 오르고 내리는 길에, 세상은 온통 살아 있었다. 산길은 그냥 산을 오르고 내리는 길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들과 함께 하는 길이었다. 나는 바위가 제 등에 짊어진, 또는 제 품에 품었던 그 든든한 길을 내게 내준 그 넉넉한 마음에 잠시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달리 나는 이번에는 좀더 확연하게 다른 길에 서 보고자 한다. 이번에 내가 서고자 하는 길은 수많은 차들이 달리는 일반적인 도로이다. 도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놓여있다. 그 말은 도로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놓여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차들은 그 길을 반으로 나누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몰려가기도 하고, 또 서쪽에서 동쪽으로 몰려가기도 한다. 아마 차를 갖고 있고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런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려본 경험이 있으리라. 물론 그 길이 길만 덩그러니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의 양쪽으로는 가로수가 심어져 있고, 그 위로는 하늘이 펼쳐져 있다. 항상 차와 사람으로 번잡한 것이 그 길이지만 아무리 번잡한 길도 잠깐씩 텅 빌 때가 있다. 언젠가 광화문에서 천호동까지 버스를 타고 들어올 때 신호등이 가로막아준 때문인지 내가 타고가는 버스의 반대편 차로는 잠깐이지만 반쪽이 텅비어 있곤 했다. 이미 길을 들어선 차들은 길을 비우며 시내 쪽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고, 그 길로 들어서려는 차는 우리 앞의 신호등에서 걸음이 막혀 그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짧은 순간이지만 길의 반쪽이 텅비어 있었다. 오규원이 섰던 길은 좀 한적한 도로였나 보다. 그 도로엔 바람도 없고, 사람도 안보이고, 차도 없고, 그야말로 말 그대로 텅빈 순간이 있었던 듯 싶다. 나도 이제 오규원이 건네준 시의 손을 잡고 그 길에 한번 서본다. 오규원의 시가 다시 그 길로 몸을 눕히고 길을 펼친다.
도로 하나가 해 뜨는 쪽에서
해 지는 쪽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해 지는 쪽에서 해 뜨는 쪽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도로의 양쪽에는 가로수들이 함께 달리며
한 구역씩 맡아 하늘을 들어올리고 있습니다
바람이 어디로 가고 사람도 어디로 가고
도로에는 지금 질주하는 도로만 가득합니다
—오규원, 「도로와 하늘」 전문
그냥 일반적인 우리의 도로에선 질주가 우리의 것이고, 도로는 그 질주의 속도를 묵묵히 받쳐주는 기반 시설로 단단하게 굳어 있다. 그러나 오규원의 텅빈 도로에선 도로가 질주한다. 난 갑자기 내가 차를 타고 질주했던 것이 혹 도로의 속도를 강탈하는 행위는 아니었을까 흠칫 놀라고 만다. 우리들이 달리는 것은 사실은 도로의 속도를 강탈하며 이루어진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그 다음 순간, 차들이 달리면서 내는 시끄러운 소음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기 시작한다. 마치 내 속도 내놔라 하면서 속도 도둑을 뒤따르는 도로의 외침만 같았다. 우리가 고속 성장이란 이름으로 누리고 있는 모든 속도란 알고보면 세상에 길처럼 납짝 엎드려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의 속도를 강탈하고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도시의 도로들은 잠시 잠깐 차들이 신호등에 걸음이 막히는 순간, 텅빈 도로에서 조용히 단거리 질주를 하면서 빼앗긴 속도를 되찾고 있었다. 갑자기 도로의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텅빈 길의 장거리 전력 질주를 보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그런 경우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2008년 6월을 달군 광화문에서의 촛불시위 때 사람들은 길을 도로교통법의 지배를 받는 공간으로만 보는 정권에 맞서 길에서 차를 밀어냈고, 그러자 길은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거침없이 질주했었다. 그 길에서 사람들이 차를 몰고 질주할 때보다 더 신나고 즐겁게 놀았던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그때 길의 속도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길과 함께 달린 것이었다. 그것도 길을 오로지 찻길로 묶어두려는 세력들에 맞서.
3. 종종 시를 읽는다는 것이 시 속에 머무는 것으로 끝나곤 한다. 아쉬운 일이다. 오규원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의 말미에 실린 해설에서 정과리가 “은유와 환유라는 지칭의 모호성” 등을 문제삼으며 펼쳐놓은 글을 읽었을 때도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오규원의 시 속에만 머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를 시속에 가두어놓고 시를 말하는 글을 읽고 나면 덧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람들에게 시 속에 머물지 말고 시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가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말하자면 시 속에 갖히지 말고 시와 함께 세상으로 가서 세상을 시로 물들이며 살아보는게 어떻겠느냐는 얘기이다. 방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그냥 산길을 갈 때 적당한 시를 하나 챙기면 되며, 또 도로를 달릴 때도 적당한 시를 하나 떠올리면 된다. 오규원의 시를 들여다보다 보면 시는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발밑에도 있다(오규원의 시 「바람과 발자국」).
오규원의 시는 특히 손잡고 세상으로 나서보기에 좋은 시이다. 그가 우리에게 내민 시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서면 굳어 있던 세상이 꿈틀대며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게 그의 시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여기에 덧붙여 내게 있어 오규원의 더 큰 매력은 그의 시와 손을 잡고 세상 속으로 걸음하면 서정적 풍경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숨쉬는 현실 속으로 더욱 깊숙이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미 보았듯이 그가 「산과 길」에서 굳어있던 길을 살아있는 길로 펼쳐놓으면 그 길은 길과 나무와 바위와 함께 가는 길로 흐르고, 그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함께가는 세상을 그 길의 너머에서 꿈꾸게 만든다. 「도로와 하늘」에서 예를 구해보면 그가 도로에 질주 본능을 돌려주었을 때 노동자란 이름으로 자본의 축적과 소통로가 되어 이 세상에 납작 엎드린 사람들과 그들이 빼앗긴 그들 몫의 인간다운 삶을 떠올리는 것 또한 큰 무리가 아니다. 이렇듯 그의 시와 손을 잡고 세상으로 가면, 종종 그의 시는 서정적 모습의 풍경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한가운데로 길을 연다. 그것이 바로 살아숨쉬는 우리의 세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니 난 앞으로도 종종 오규원의 시와 손잡고 살아 꿈틀대는 세상에서 살아갈 거다. 바로 날이미지의 세상에서.
22 thoughts on “길을 읽는 두 가지 방법 – 길을 주제로 한 오규원의 시 「산과 길」과 「도로와 하늘」”
저는 길치인지라 잘 가다가도 아주 중요한 순간에 반대 방향으로 틀곤합니다.
고짓을 길 위에서 하면 가다가 되돌아오면 되지만
인생이라는 길에서는 세월과 맞바꿔야 하더군요.
중요한 건 정작 맞바꾼 저는 별로 후회스럽지 않은데
주변인들이 더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오히려 더 송구스러워집니다.
길을 읽는 한 가지 방법이라도 날로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길을 다양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한 길로 가야하는 사회는 별로인 듯해요.
그래도 우리 사회가 점점 다양성을 인정하는 길로 가는 건 다행인듯… 물론 아직 먼 것 같기는 하지만요.
오랜만에 평론이 올라왔네.
당신 평론은 무엇보다 쉬워서 좋아.
더구나 시가 우리의 삶 속에 깊숙히 들어앉아 있어서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되니 더 좋구.
나두 오자 하나 발견. 숫자 5字는 절대 아님.
발견해서 고치기 바람. ㅋㅋㅋ
근데 발견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듬.^^
하나 더 발견.ㅋㅋㅋ
오랜 만에 써서 그래.
내가 쓴 건데도 발견하기 힘들다.
발견하기 힘들거라 예상했음.ㅋㅋ
한번 더 기회를 주겠음.
잘 찾아보고 없으면 못찾겠다 꾀꼬리를 부르게나.
그럼 갈켜주겠음.
발견의 수고를 이중으로 하게 하지마.
자꾸 그럼 글쓰는 수고를 네가 지도록 하게 한다.
내가 쓴 글을 함께 나누듯이 오타 발견의 수고도 함께 나누도록 해.
네가 좋아하는 예수님도 말씀하셨잖아.
“오타 찾기로 힘든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이미 찾아놓았느니 기꺼이 나누어 주겠노라.”
말씀대로 좀 살어!
두드려라 그럼 열릴 것이며
찾아라 그럼 찾아질 것이니…
말씀을 들먹이지 말고 못찾겠다 꾀꼬리 열창이 더 좋겠다.
오자를 내더니 오기를 부리는구먼. ㅋㅋ
쓰는 게, 이미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행위야, 이 사람아.
나머지 짐은 나눠져야지.
항상 보면 앞뒤 전후를 구분 못하신단 말이야.
역시 말씀을 입에 달기는 쉬워도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어렵구만… 에혀.
요즘 사이비가 너무 판을 쳐서 말이야.
사이비들은 뭐든지 문자 그대로 읽으려는 속성이 있거든.
잘 분별해야 해. 어흠~.
혹시 댁이 바로 그 사이비 아니슈. 의심가오.
사이비란 먼저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디밀어
자기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려는 자들의 무서운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
이들과는 길게 얘기하기가 어려우니라.
고로 말씀을 들어 자기 뜻을 끝까지 관철하려 하지 말지니라.
이번에 틀린 단어도 납짝업드리라고 하는데 이리 틀리니 엎드리는 걸 잘 못하지.
그대 잠시 납작 엎드려 보시라.
그럼 그대 발 밑이 잘 보이리라.
오자 찾기는 다른 글에서는 그닥 신경쓰지 않는데
평론이나 어디에 실린 글들에서는 오자가 무지 신경에 쓰인다네.
그게 어디를 봐서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디민 것으로 보이유.
오타의 오자도 성경에선 찾기 어려울 듯 싶소.
댁이야 말로 두드리라는 성경의 문자를 자기도 아니고 남에게 무서운 믿음을 갖고 강요하니 이 어찌 사이비가 아니오. 더욱 의심이 가오.
오자 찾아낸 그 능력을 남에게 따뜻이 베풀면 해결될 것을 남을 굳이 엎드리게 하니 이 또한 더욱 의심을 부채질하오.
부채질하면 이 계절에 너무 춥소.ㅋㅋ
하긴 오자 발견은 나의 기쁨이니
부디 많은 오자를 내시길…ㅋㅋㅋ
건필하시오.
고맙소.
그럼 부채질은 그만두리다.
* 감상 *
낯익은 것들에 묶여서 때론 가장 실제적인 날이미지는 커녕 기본적인 감각조차 잃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 있었어요.
어느 날 설거지를 하면서 처음으로 해보는 설거지처럼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해보자고 마음 먹었던 적이 있어요. 손에 닿는 쏟아지는 수돗물의 느낌, 물소리, 그릇 부딪히는 소리, 미끌미끌한 트리오 거품의 느낌.
매일 하면서 제 감각이 이걸 인식을 했었나 싶더라구요. 익숙하고 낯익은 시를, 세상을, 삶은 제 눈에 익숙한 것에 단단히 묶어두지 않아야 할텐데요….
* 쌩뚱맞은 감상 *
요즘 읽는 책에 길에 관한 얘기가 계속 나와요. 사람의 길에 관한 얘긴데…
사람마다 걷는 길이 다르다.
누군가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면 그 길은 반드시 길이다.
길은 여러 개다.
누구든 자신이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걷는다면 반드시 가장 좋은 종착점에 도착한다.
요즘 ‘길’이란 말만 들어도 귀가 번쩍 뜨이는데 길을 읽는 두 가지 방법이라 하시니 눈이 번쩍 뜨였어요.^^
* 뱀의 발 *
웬만해선 오타를 찾을 수 없는 이 곳에서 오늘 두 개의 오타를 찾아냈어요.ㅎㅎㅎ
호호, 감사합니다.
오타를 찾아내, 고쳤습니다. 문장도 좀 손봤어요.
갑자기 생각이 나서 급하게 쓰다보니…
감상은 제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인간은 어디로부터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가.
요것 참 골때리는 말 입니다.
고등학교 철학 시간에나 나올법한 얘기가 사실은
사람이 걸어가는 길에 관한 지침서라는걸,
사람마다의 길을 확신하고 곧장 걸어간다면 그것만큼
축복받고 행복한 일은 없을거라는 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이라고 후회할 날이 올 것 같습니다.
아휴, 어려워요.
살면 살수록 확신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는 듯…
돈이면 세상 다되는 것 같다가도 돈걱정 하나는 전혀 없을 것 같은 인간들이 자살하는 것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냥 끊임없이 흔들리며 살아가 보는 수밖에 없는 듯 싶어요.
오규원 시인의 시와 함께 길을 걸어 가는 동원님의 뒷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시를 종이에 박혀진 의미로만 바라보지 말고, 탁 트인 공간 속으로 시를 데리고 나가라는 뜻인가요. 그렇게 생각하고 시를 읽어 보니 훨씬 자연스러운 느낌입니다.
이제부터는 시를 읽을 때, 시와 손을 잡고 세상의 공기를 함께 나누어야겠어요.
예전에 교향악단이 시골을 방문해서 마을 한가운데서 연주를 하고 연주하는 가운데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음악을 듣는 브라질의 한 사진을 볼 수 있었어요. 이미지로 따지자면 그런 풍경이 되지않을까 싶습니다.